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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 한국] 본지 논설 김문길 박사...27일 화산교회서 문화대학 강연 - (일제 강제징용 영천지역 희생자 유족 찾기 특강) - 1942년 강제징용 영천인 피해자 15명 명단 발견
  • 기사등록 2023-04-18 23:52:47
  • 수정 2023-04-19 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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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논설 김문길 박사...27일 화산교회서 문화대학 강연

"일본 속에서 한국 역사 찾는다." 연재 ⑭

(일제 강제징용 영천지역 희생자 유족 찾기 특강)


1942년 강제징용 영천인 피해자 15명 명단 발견

일본은 '자유도항', 한국은 '강제징용' 아직 논쟁

1942년 14세 이상 농민들 '강제징용' 해 갔다.

강제징용 조선인 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 침몰

'우키시마호' 폭발·침몰, 일본 의도적 폭파 의혹

'타이타닉호' 2223명, '우키시마호' 8000명 추정


▲ 본지 논설 김문길 박사


"일본 속에서 한국 역사를 찾는다"는 명제 아래 2016년부터 줄곧 본지 논객으로 활동해 온 김문길(78) 박사가 이번에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희생당한 영천지역 피해자 유가족 찾기에 나선다.


김 박사는 오는 27일 오전 11시 경북 영천시 화산면 화산교회 초청으로 일제 강점기 영천지역 강제징용자 피해 규모와 그 실상을 밝히는 문화대학 특강을 실시한 후 이날 피해자 유족을 찾기 위해 당시 피해자 15명의 주소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김 박사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당시 20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 노무자로 일해왔다. 일본 정부 통계를 인용하면 김 박사는 당시 탄광에 노무자 60만 명, 군무원 공장 40만 명, 토목공사에 30만 명, 광산 노무자 15만 명, 항만공사 5만 명, 군인·군속 노동자 37만 명, 종군위안부 13만 명인 것으로 파악했다.


정치적 쟁점은 일본은 강제징용은 없었다는 것이고 한국 정부는 그 반대 논리다. 김 박사는 여기에 대해 1938년 만주사변(일본 전쟁 준비)후 일본은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당시 조선노동자들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 자유 도항”을 했다면서 그러나 근로보다 돈이 되지 않자 당시 약 70%가 귀국을 원했다고 밝혔다.


또 일본은 당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전쟁물자 생산 등 많은 일력이 필요해 1940년도부터는 (일본) 정부 알선으로 돈을 많이 벌게해 준다는 핑계로 영천군 일대에서만 4차례 5~6000명을 권고 모집했는데 속임수였다는 주장이다. 그 때문에 대다수 자유 도항 근로자들 70%가 귀국을 원했다는 기록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노동자가 더 필요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한국은 1942년 이후 강제징용을 주장했고 반대로 일본은 1938년 조선인 자유도항만을 고집해 지금까지 정치 논리만 앞세우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 박사는 당시 1942년 총독부가 경북의 의성·군위·영천 등에서 강제징용으로 끌고 간 노동자 중 영천인만 15명 정도로 현재 그 주소를 모두 확인했다고 밝혔다.


▲ 김문길 박사가 밝혀 낸 1942년 일본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영천인 15인 명단


이들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 탄광에서 일했는데 당시 근로 탄광이 바다 수면 아래에 있어 갑자기 물이 들어차면서 일순간 모두 익사했다고 김 박사는 말했다.


김 박사의 일본에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당시 영천 징용자가 일해 온 바다 수면 아래 탄광은 일본 장생탄광으로 밝혀졌다. 야마구찌 우베시에 있다. 탄광이 무너지면서 1942.4.3 183명이 모두 일순간 익사했다.


이 사망자 중 130명은 조선인이고 53명이 일본 노무자로 확인되고 이들 사망자는 아직도 사고 현장 바다에 묻혀있다. 이들 중 영천지역 노모자 15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땅 소유주가 개인이고 조선인 숙소 등 건물은 일본 정부 소유인 까닭에 법적 분쟁으로 지금까지 폐허가 된 조선인 숙소와 탄광이 그대로 남아 있어 김 박사는 이들 피해자 조선 노무자의 실체를 더 파악하고 있다.


김 박사가 찾아낸 이들 명단을 살펴보면 당시 영천군의 주소지 지번까지 명확하게 기록됐고, 일부는 동리만 기록된 예도 있지만 이름은 일본명으로 일본식 성명을 강요한 터라 역순 하면 한국인 이름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이날 강연 후 고경면과 신녕면, 임고면, 영천시청에 들러 이들 강제징용 피해자 주소지 유가족 찾기에 협조를 당부할 예정이다.


김문길 교수는 1965년 한일협정 후 곧바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지금까지 일본 속에서 한국 역사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교토 대학 (국립대)에서 한일역사를 연구하고 국립 고배대학에서 석. 박사 학위(역사분야: 학술박사) 취득 후 줄곧 우리 민족의 문화·역사 발굴에 심취해 왔다.


고향이 영천인 김 박사는 늦었지만 강제징용 영천 피해자 유족을 찾는데 이제 영천 시민들이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화산교회 초청 특강도 한국 교회사를 연구한 김 박사로서는 당시 (『일본기독교 조선 침략』:철학 박사 논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본 유학 때 선교사로 일하며 일본 속 한국 역사는 물론 일본 역사를 연구해왔기 떼문이다. 오늘날 까지 김 박사가 고향 기독교인들과 소통하고 나눔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다.


▲ 비문


김문길 박사는 앞서 1945년 광복 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고국으로 향한 귀국선(상선을 군함으로 개조) 4703t급 우키시마호가 폭발로 침몰한 원인을 밝히는 문서를 찾아내 국내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했다.


당시 우키시마호는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교토 마이즈루만에서 폭발·침몰했다. 당시 일본은 미군이 바다에 매설한 기뢰에 의한 침몰로 규정했고 조선인 3752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 등 3980명이 승선해 이 중 조선인 524명,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김 박사는 일본의 의도적인 폭발을 의심하고 있다.


김 박사 등은 당시 우키시마호 승선 인원은 약 8000명이고 사망자와 실종자가 약 5000명, 생존자는 30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 박사가 일본 지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발신전보철'이라는 일본 방위청 문서에 따르면 당시 우키시마호에는 폭발물(박격포 및 포탄)이 실려있었고, 또 폭발물을 해상투기한 흔적이 없으며, 일본 해군은 10%만 사망한 점, 일본 우키시마호 유족들이 1992년 일본법원 재판과정에서 제출된 이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점, 폭발 전에 배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다는 증언 등을 들어 일본이 의도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폭발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해놓고 있다.


참고로 1912년 4월 15일 침몰한 타이타닉호 승선 인원은 2223명이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해방을 맞으면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조선인의 부푼 희망을 산산조각낸 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 승선 인원은 그 2~3배가 넘는 3980명~8000명으로 추정돼 세계 최대인원 침몰사고로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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