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임란 왜군 집단탈영, 울산 정착 호적 대장 발견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강왜(降倭) 첫 공개
만력기유(萬歷己酉)...서울대 규장각 원본 보관
주인장(朱印狀)...도요토미의 탈영병 통제 명령
사노(私奴), 향화(向化), 소모·소사(召募.召史)자
임진왜란(전쟁) 이후 왜군이 강왜(탈영, 降倭) 하여 조선인(신분)으로 울산에 정착한 자료(울산 호적 문서)가 최초로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강왜(降倭)는 '항왜'라고도 읽는다. 전쟁 이후 일본군이 탈영하여 조선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이 호적은 임진왜란 당시 탈영한 왜군들의 울산 정착 분포와 구체적 신분( 조선인 성씨)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 50여 명의 이름, 동향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56쪽 분량으로 표지에는 "만력기유(萬歷己酉)로 되어있다. 임란 후 강왜 기록 울산 최초 호적이다.
그 외에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조선인), 전과를 올린 조선인 군관·의병의 가문 이야기, 노비가 된 사람, 참전으로 울산에 호적을 둔 제주 해녀,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정착한 명나라 군인 등 전쟁 후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왜군이 탈영하여 정착한 내용이 56페이지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김문길(부산외대 명예교수) 박사는 20일 본지에 이같은 자료를 소개하고 "영천으로 이주해 간 탈영자들도 있다"라면서 이같이 분석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자료 원본은 규장각(서울대 한국학연구원) '광해일년기유울산호적(光海一年己酉蔚山戶籍大帳)'에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울산 지역 향토 사학자였던 고(故) 이유수 선생이 생전에 '강왜 기록의 후속 연구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제(김 교수)게 그 내용을 건네준 것이다"라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당시 강왜 인원이 광범위하게 분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적 대상이 대구 가창과 경남 산청, 마산(진해) 등으로 넓혀진다. 기존 전해지는 규모에 비해 훨씬 더 많다는 내용이다.
또 사노(私奴)=노비가 된 사람, 향화(向化)=명나라군이 참전해 공을 세우고 귀화한 사람, 소모자 소사(召募.召史)=타 지역에서 남·녀가 전쟁에 참여한 후 귀화한 사람 등의 기록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향화(向化)의 대표적 장군은 마귀(麻貴)다. 마귀(麻貴)는 명나라 제독으로 서생성에서 명군을 지휘해 공을 세워 (선조) 임금으로부터 마(麻)씨 성을 하사받아 창표당을 세우면서 귀화했다. 오늘 날 마씨들은 북방계 여진족의 마귀(麻貴)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일본의 역사가 중 1593년에는 한꺼번에 100여 명씩 강왜 했다"라고 주장하고 "당시 전쟁에 일본군 20여만 명이 참전해 수만 명이 강왜 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했다. 후속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기록에는 왜군을 탈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요토미의 비상 명령서인 주인장(朱印狀)도 발견됐다.<주인장(朱印狀)=한 개만 존재하는 도요토미의 옥쇄가 찍힌 문서>
주인장(朱印狀)의 발행 시기는 문록 2년(1593년) 2월 14일이다. 430년 전 임진 전쟁으로 일본이 한양을 점령할 시기 중국 명나라군이 진군하여 일본군이 후퇴하는 정유재란 때다.
「많은 일본 병사가 탈영하니 치안 유지를 철저히 하여 비상대책을 세우라는 명령서로 각 부대 지휘관이 병사를 통제하고 개인행동을 금하며, 이동 시에는 조별로 움직이고 조장을 감시하는 한편 왜성 출입문을 철저하게 단속하라」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임진왜란 후 강해 기록인 만력기유(萬歷己酉)는 울산의 최초 호적 기록으로 또 주인장(朱印狀)은 임진 전쟁 후 왜군이 집단으로 탈영한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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