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한국인 최초 하버드 역사학 박사 조직량(본명 曺稷浩),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귀애고택' 출신
조 박사, 귀애고택 조극승(曺克承) 증손
스위스 부인 MD 박사는 조선역사 대가
귀애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62호
논문-(대원군의 통치, 조선왕조의 복고)
영천의 창녕조씨 현세 손 조직량(본명 曺稷浩)의 영문 유작이 발견되어 국내 사학계의 잔잔한 관심을 불러오고 있다.
조 박사는 '귀애고택'의 현세 손이다. 귀애고택은 조선 순조 때 관료 겸 학자인 귀애 조극승(曺克承:1803~1877)의 학덕을 기리고 추앙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영천시 화남면 귀호길 경상북도 162호 민속문화재다.
조 박사의 학위 논문은 <대원군의 통치, 1864-1873: 조선왕조의 복고>라는 이름으로 하버드 옌칭 연구소에서 영문 서적으로 발간됐다. 그가 작고한 뒤 6년 후다. 원제는 “The Rule of the Taew?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다.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0년 이전의 조선왕조 사회·경제적 환경을 서술한 1장에서 시작하여 흥선대원군의 몰락을 다룬 13장까지 263쪽이다.
하버드 동아시아연구센터는 조 박사의 논문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연구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고 유망한 젊은 학자에 대한 기념비라고 극찬했다. 책은 초간본과 재간본으로 재간본 표지에는 한자로 <大院君의 革新政治>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은 조 박사가 별세한 후에 발간돼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영남좌도 역사산책>을 저술한 역사연구가 이도국이 이를 추적하여 도이힐러 박사의 시댁과 남편 조직량이 하버드 최초 역사학 박사임을, 그리고 그의 영문 유작을 찾아내 처음 공개됐다
<위클리오늘> 취재에 이도국씨는 "학문적 성취는 널리 알려져야 빛이 나니, 어려웠던 시기에 조국의 미래를 깊이 침잠하고 학문에의 열정으로 매진한 젊은 사학자의 연구가 현양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했다.
조직량(본명 曺稷浩 1927~1966)은 귀애고택에서 태어나 6·25 때 유엔군 통역을 담당하다 1952년 25세에 미군의 도움으로 도미해 덴버대학을 거쳐 33세에 하버드에서 도미 8년 만에 한국인 최초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하버드 전체로는 1956년 경제학의 최기일 박사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 후 조 박사는 독일로 건너가 본 대학 등에서 수년간 한국사를 강의하다가 1966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이같은 기록이 전해지게 된 것은 조 박사의 아내 역사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박사 때문이다. 도이힐러 박사의 시댁이 바로 영천시 화남면 '귀애고택'의 귀애 조극승(曺克承) 가(家)다.
부인 도이힐러 박사는 스위스인으로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조선 역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도이힐러(1935~) 박사는 2018년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비롯하여 4권의 우리나라 조선 씨족사회의 역사서를 저술해 큰 반항을 불러왔다.
아내 도이힐러 박사는 남편 조 박사가 작고한 이듬해인 1967년, 짧은 결혼생활을 마치고 혼자 한국으로 들어와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규장각과 국내외 대학교에서 50년간 조선사를 연구하여 우리나라 친족, 문중, 신분, 유교화 과정 등 조선 사회사 연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다.
고택에는 도이힐러 박사가 시댁 친척과 찍은 사진, 영문 저서 등이 있고 한국 이름이 ‘두정나’라고 한다. 그녀가 고택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곳은 250여 년 전에 지어진 조선 양반 가옥의 부엌이었다.
이도국 역사연구가는 "6.25 전란 속에서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가 각고의 노력으로 33세에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 역사학 박사가 된 조직량 박사의 학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요절한 남편 조 박사의 뜻을 이어 50년간 조선사를 연구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던져준 그의 서양인 아내 도이힐러 박사에게 경의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조직량(본명 曺稷浩, 창녕조씨 41세) 박사의 생가 '귀애고택'은 귀애공(龜厓公)의 증조부 묵헌공(默軒公) 조명직(曺命稷 창녕조씨 34세)이 조선 영조 43년(1767년) 이곳으로 이주하여 세거지를 마련한 후 37세손 귀애 조극승(曺克承)(1803~1877)에 이어 운파 조병수(曺秉秀)(1832~1903), 39세손 조세환 삼대가 귀애정·사당·별묘·육각정 등 47칸을 건축하였다.
1988년 화재로 사랑채 등 15칸이 소실되고 지금은 1991년 사랑채 등 일부가 복원되어 귀애정과 사당, 연못 속에 육각정이 주변과 잘 어우러져 조선시대 4대부의 아름다운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옥이다.
때문에 자연과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풍광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62호로 지정되어 43세손 조명목에 의해 현재 한옥 숙박 체험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다음은 역사 연구가 이도국씨가 추적한 조 박사의 이력이다.
-조직량(본명 조직호 曺稷浩, 영문명 Ching Young Choe)
-1927년 12월 27일 경북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귀애고택 출생
-4세 때 서당에서 한학 공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야마구치고보에 유학
-1946년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 취득 후 경주에서 영어와 수학 교사
-1948년 서울 중앙대학교(?) 입학 (추가 확인 필요)
-6.25전쟁 때 유엔군 통역관 복무
-1952년 1월 도미, 미국 덴버 대학교에 입학
-1954년 여름 국제관계학 학사 학위 취득
-1954년 가을 하버드대학교 입학, 하버드 옌칭 연구소 장학금으로 중국·일본·러시아 연구, 경제학 및 인류학 등 광범위한 연구
-1956년 6월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 지역학 석사학위
-1960년 6월 하버드 대학교 대원군의 개혁 정치 연구로 박사학위 (한국인 최초 하버드 역사학 박사)
-1956년부터 1958년까지 하버드에서 한국어 교수
-1960-61년 미국 학술 단체 협의회에 한국사 강의 계획서 편찬
-1962년 하버드 동아시아연구센터 연구원 역임
-1962년 10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에서 펠로우십 수상 후 독일의 본으로 건너가 한국의 사회 경제사 연구 후 본 대학교 한국어, 한국 역사 교수
-1963년 11월 논문 <김육(1580-1658)과 대동법 개혁> 아시아학 저널(제23권 제1호; 1963년 11월)에 발표
-1965년 가을 독일 마르부르크/란(Marburg/Lahn)의 부름을 받아 국립도서관(Staatsbibliothek) 한국어 분과 Preussischer Kulturbesitz 담당
-1966년 7월 8일 수개월간 투병 끝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
-1972년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 논문 영문 출간.
저서: The Rule of the Taew?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 (1972, 하버드대학교 옌칭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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