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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조선통신사 최천종과 김한중의 억울한 죽음...김문길 박사, 조선통신사의 비극사 공개
  • 기사등록 2024-04-26 21: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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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조선통신사 최천종과 김한중의 억울한 죽음

...김문길 박사, 조선통신사의 비극사 공개

조선통신사는 처음부터 일본의 위작

최천종·김한중은 일본인에 살해당해

두 비극적 일본 유해 국내 모셔 와야


▲ 영천투데이 논설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박사


귀·코무덤, 광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등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아 일본인의 만행을 폭로해 온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박사가 이번에는 조선통신사가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경북 영천이 고향인 본지 애독자인 김문길 박사는 "조선통신사 통역관 최천종(崔天宗)과 부관 김한중(金漢重)은 일본인에 의해 살해돼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이들의 일본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한다"라며 25일 자료제공과 함께 이같이 밝혔다.


26일 <영천투데이>와의 통화에서 김 박사는 "조선통신사는 일본과 조선 사이 한·일문화의 최고 평가를 받으면서도 그 출발은 문서 위작과 통신사 살해라는 비극적 역사에서 시작됐다는 것.


조선통신사 문서 위작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중국과의 전쟁을 위해 조선이 그 길을 내어주길 원하면서 대마도 번주 소요시토시(宗 義智)에게 조선-일본 동맹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이 요구로 소요시토시는 도장(옥쇄)을 위조해 조선-일본 동맹을 강요했지만 1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시대가 열리고 일본은 조선 문화의 우월성에 감탄해 지속해서 조선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라도 조선통신사 초빙이 절실했다.


대마도 번주 소요시토시(宗 義智)는 조선 임금의 옥쇄 위조로 문서를 위작해 조선과 일본 양국에 보내 일본에서는 조선 통신사를 맞이했고 조선에서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돌아온다는 의미로  ‘회답겸쇄환사’로 첫 교류가 시작된다. 대마도 본주가 조선과 일본에 각기 다른 위작 문서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 위작된 이름의 조선통신사 사절인 최천종은 일본의 평화 교류 의미가 없음을 알았고 에도시대 막부의 중신 아라이 하쿠세기(新井 白石)는 조선통신사를 반대하며, 최천종을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조선인 멸시와 함께 추방운동을 일으키면서 일본인에 의해 최천종은 살해당했다.


▲ 대구 시람 최초 조선통신사 최천종의 위패와 마지막 조선통신사 김한중의 무덤 표지(오른쪽)


이런 최천종의 살해 사실은 일본인 사이에 큰 반향(자랑거리로)을 불러왔고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에도 막 막부시대 카부끼단(영극단)이 “최천종 조센징 살해”라는 제목의 연극을 만들어 자랑하면서 해방 전까지 그 행사를 이어왔다. 일본인들은 이런 조선인 살해 기념을 위한 비석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일본의 만행 역사로 발견된 것이다.


지금도 교토에 가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사들이 전쟁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와 이를 묻은 조선인 '귀·코 무덤'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최천종 조센징 살해” 연극 후 매번 최천종의 살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 울타리로 남아있다.


메이화원년(明和元年:甲申年)2월8일 마지막 조선통신사(11회)로 갔던 부관 김한중(金漢重) 역시 살해당했다.


일본 정부는 김한중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라이하쿠세끼 의 조선인 멸시론 때문에 일본 우익단체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반면 최천종(위패) 김한중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본인도 있다.


▲ 조동종(절) 다케린지(本町1丁目9-3番地曹洞宗) 주지 스님이 오사카시 서구 혼마치1정목9-3번지 조선통신사 김한중의 무덤 앞에서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사진/김문길 박사 제공)


코로나-19가 있기 전 최천종·김한중 두 통신사의 죽음에 대한 추도식이 연년이 따로따로 이어져 왔지만 금년 초에는 두 사람 추도식을 동시에 올려졌고 이를 주관한 다케린지 조동종 절 주지 호사카 마사아끼는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도록 주선해주어야 한다"며 추모하고 있다.


최천종은 위패로 김한중의 묘는 현재 오사카시 서구 혼마치1정목9-3번지 조동종(절) 다케린지(本町1丁目9-3番地曹洞宗)공동 묘지에 있다.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은 “최천종 살인 사건은 현재 외교 문제로 비화해 있다."라면서 "두 조선통신사의 유해가 고향(한국)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영천시 청통면 호당리가 고향인 김 박사는 79년부터 일본 교도대학과 고베대학에서 일본문화와 문학연구(일본사)를 시작해 1995년부터 현재까지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발굴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해 온 한·일문화(역사) 학자다.


그는 △왜곡된 일본 교과서 지적, △한국사 傳(전) 덕혜옹주, △대마도 관련 연구, △일본 고문서를 통해 본 대마도와 독도, △임진왜란 코무덤 등 수많은 역사를 일본 속에서 연구 발견해 왔다.


특히 김 박사는 기마문화 조선통신사 '마상제'를 발굴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영천에서 재현하여 조선통신사에 연결한 학술 인이다.


김 박사에 따르면 1592년부터 1598년 10월까지 임진·정유 전쟁은 일본이 조선 문화를 약탈한 전쟁이다. 일본은 전쟁 때 조선 문화재 약탈과 문화인을 잡아가서 부를 축적했다. 도쿠카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의 문화에 더욱 탐이 나서 조선과의 동맹을 위해 조선통신사를 초빙했다.


조선 조정은 전쟁 때 빼앗긴 조선 문화인들을 일본이 돌려보내지 않자 문화교류를 하자는 초청장(조선통신사)을 받고는 반발해 조선통신사를 보내지 않았었다.


당시 조·일 관계에서 관문인 대마도의 번주는 조정 의견을 참고해 잡혀 온 문화인을 돌려주는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으로 막부(幕府) 모르게 위작의 초청장을 조선에 보내오면서 조선통신사는 '회답겸쇄환사' 이름으로 일본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는 '회답겸쇄환사'를 위장한 위작 명칭이다.


<이 글은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박사가 제공한 자료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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