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김문길, 日 군승(軍僧) 일기 최초 공개
창의정용군, 96일 만에 영천읍성 탈환
권응수 창의정신, 의병조직·전술 극찬
임진왜란 아닌 임진전쟁으로 불러야
임진전쟁(1592~1598) 때 영천읍성 수복전투 (의병) 창의정용군 권응수 장군의 전술과 의병 조직력을 칭찬한 일본 문서가 5일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아 국내에 공개해 온 김 박사는 본지에 임진전쟁(왜란) 당시 日 종군 군승(軍僧) 게이넨(慶念)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를 일본 오이타현 역사사료관에서 찾아내 이같이 공개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당시 왜군은 조선 모든 지역에서 승전 전력을 과시하면서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승전 전리품으로 챙길 만큼 기세가 하늘을 찔렀던 때다.
반면 조선은 일본의 전세에 눌려 왜병(이비야가 온다)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생긴 데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전투에서의 권응수 장군과 영천 지역 연합창의정용군의 전술과 향군 정신 및 의병 조직력을 극찬한 문서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이례적인 희귀한 자료다.
김 박사가 공개한 『朝鮮日日記』에 따르면 게이넨(慶念)은 일본 오이타현 안량사(安養寺) 주지로 임진전쟁에 참한 日 종군 군승(軍僧)으로 매일 참전 일기를 썼다.
일기는 "영천성을 점령해 싸웠으나 퇴진하고 말았다"며 영천성을 조선 의병들에게 빠르게 빼앗긴 기록으로 영천 지역 의병들의 활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문서에 따르면 임진전쟁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와 2시간 만에 부산진성을 빼앗고 한 달 후 가토기오 마사(加藤淸正)의 후속 공격에 동래성과 영천성을 함락시킨 후 잇따라 강원도 원주를 거쳐 한성(서울)까지 속전속결로 입성했다.
이후 일본은 영천성을 600명의 병사와 함께 하급 부대인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에게 맡기고 한양전투를 거쳐 중국까지 넘봤으나 명나라가 가담하여 남으로 하진(下陣)할 때다.
이때 권응수 장군은 영천성을 점령한 일본군을 상대로 그해 4월27일 첫 의병을 창의하고 5월 6일 영천 지역 대동전투, 한천전투 등 소규모 유격전을 벌여왔다.
그리고 5월 27일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지역 연합유격대를 결성하고 6월부터 의병장 정대임과 함께 7월22일까지 영천과 대구 전로를 끊은 당지산(당고개)산의 당현전투(지금의 영천경찰서 뒤)와 창암전투(지금의 3사관학교와 고경면 전로 차단), 의성과 청송 간 길을 끊는 박연전투, 화산면 들판전투, 사천전투(죽곡 올라가는 길) 등에서 유격전을 펼쳐왔다.
그리고 그해 7월 26일 영천성을 점령한 일본군과 대 접전을 벌여 영천성을 탈환했다.
앞서 권응수 장군은 임진전쟁 10년 전 여진족과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관군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병을 일으켜 독자노선으로 왜병과 전투할 준비를 해왔다. (『임진왜란 사』 이종욱, 1995), (『백운재실기』 권응수)
게이넨(慶念)이 쓴 '조선일일기' 1592년 8월 28일 자에는 "7월 26일 영천성은 권응수의 창의정신이 투철한 것과 체계적 조직으로 인근 의병들 3000명을 모아 600명의 왜군을 물리치고 영천성을 회복했다. 전술도 뛰어났다. 한 부대는 성의 담을 넘어 돌진할 때 기마병들은 성문을 열고 들어감에 주둔한 왜군들은 삽시간에 도망했다. 권응수 창의군은 포로로 잡혀있던 남녀 모두를 풀어 주고 군량미와 병기고를 방화했다"고 적었다.
이 같은 영 천성 패배 기록은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문서를 연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합전 총람' 누쿠이 마사 유키(貫井)편 242P에 적혀 있다.
이 문서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싸우고 있는 왜장들 가운데 영천성 전투만은 실패하고 말았다"라고 적혀 있다.
이번 자료를 공개하면서 김 박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 임진전쟁을 왜란(倭亂)으로 표기한 것은 역사를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가해국이지만 임진왜란을 문록역(文祿役)에서 임진전쟁으로 가르치는데 피해국 한국은 '난(亂)'이라 가르친다. 난은 국내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왜군들이 쳐들어와 전쟁을 한 것인데 어떻게 '왜란'이라 하는가”라며 “한일 강제 합병 후 경성제국대학을 만든 일본이 미화시킨 왜곡된 용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김 박사는 강조하고 있다.
그는 “당시 의병들이 영천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영천읍성을 수복한 사실은 세계사적 자랑거리다. 침략한 왜군이 조선 땅을 거의 점령해 조선인 남녀노소를 죽이고, 귀와 코까지 잘라 승리의 상징으로 '조선인 귀·코무덤' 조성했다”면서 애국애족 정신을 가진 영천 신령 출신 권응수(權應銖) 장군과 의병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김문길 박사는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경북 영천(청통 호당)에서 태어나 올해 일흔아홉의 일본 역사 전문 노학자로 46년간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 찾기에 올인하고 있다.
그는 79년부터 일본 고베대대학원 일본문화, 일본사(한일관계)전공 학술박사, 철학박사 등 박사학위 취득 후 1995년부터 2012년까지 17년간 일본문화(문학)연구 시절 수집한 『조선잡기』(1926년 출판) 연구에 아직도 몰두하고 있다.
김문길 박사는 △한일일어일문학회 회장, △동아시아 일본학회 부회장, △국제지역학회 부회장, △부산외국어대 동양어 대학장, △일본 지역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자신의 호를 딴 △峴井(현정)장학회 회장과 △한일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