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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3·1운동 발원지' 표석 제막식장, 독립운동가 후손의 눈물 - 표석 주인공, 구위준(신녕면 왕산동), 1919년 3.1 당시 18세
  • 기사등록 2019-03-15 19:19:34
  • 수정 2019-03-15 19: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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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녕초 앞뜰에서 그날의 만세운동 재현
김준운·김호용 父·子독립운동가 가족도 참여
◆김준운 손녀 김옥조·손부 정화선씨 감격의 눈물


▲ 제막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강병찬 기자〕
영천시는 지난 15일 신녕초등학교 앞뜰에서 '영천지역 3·1운동 발원지 표지석'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市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회 분위기 조성 및 독립유공자 후손과 시민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행사는 1919년 3월15일 영천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장소에 맞췄다. 이날 최기문 영천시장과 박영환 도의원, 조창호 부의장 및 시의원, 정우동 지역민주당위원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신녕초등학생들과 교사들 모두가 함께 했으며, 박진규 전 영천시장과 최기문 시장의 부인 이호성 여사도 뜻 깊은 행사에 동참했다.


특히 이날 김준운 독립운동가(이하 존칭 생략)의 후손인 김옥조, 정화선씨가 찾아와 맨 앞줄에 서서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 15일 최기문(오른쪽 만세) 시장의 선창에 따라 영천 3.1운동발원지인 신녕초 전정에서 1919년 3.1운동의 `대한독립만세`를 재현했다.


단정한 옷차림을 한 참석자 모두의 손에는 저마다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제막식에 앞서 만세운동이 재현됐다. 최기문 시장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우렁차게 외쳤다. 이어서 이들은 흰 보자기에 싸인 조그만 비석 앞으로 드리워진 두 줄로 열을 지어 나란히 섰다.


흰 보자기를 벗기자 안에는 ‘3·1독립운동발원지’가 세로로 새겨진 화강암 비석이 드러났다. 비석 위쪽 검은 돌 부분에는 “영천지역 3·1운동은 18세의 구위준이 1919년 3월 15일 10시경 신녕면 화성동 소재, 신녕공립보통학교 1학년 교실 밖 게시판에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써서 독립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영천에는 이번 표석에 새겨지는 구위준님 외에도 박필환, 이성백, 황정수, 김호용, 박칠성, 김해오, 노영수, 김준운, 허석, 조율이, 홍종현, 조병진, 조재복, 김정희, 김낙헌님 등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는 행정구역이 영천면과 신령면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만세운동은 그 해 3월 중순부터 4월 말께까지 신령에서 영천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들 중에는 일제에 의해 중형을 받은 경우도 있다.


▲ 김준운 독립운동가의 손녀인 김옥조(앞줄 가운데)씨가 감격의 눈시울을 붉혔다.


◇ 김준운·김호용 후손도 참석

이날 행사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김옥조, 정화선씨 가족의 경우는 조부 김준운과 부친 김호용 모두 만세운동을 전개했다가 중형을 선고 받았다. 김옥조씨는 김준운의 손녀이고, 정화선씨는 손부이다.


조인호 교장(신라고) 등이 집필한 ‘영천의 독립운동사(도서출판 성심)’ 중 3·1운동 부분에는 김옥조(83·청통면 신원리) 할머니의 조부 김준운과 부친 김호용 부자의 활약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영천군 신녕면 완전동(莞田洞)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김준운(金俊運)은 개신교 북장로교파 교인이었는데, 4월 초 한국이 독립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4월 6일 일요일 오후 1시경, 신녕면 완전동 부근의 하천가에 모여 있던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황정수(黃正秀) 등 10여 명을 만났고, 이들과 4월 8일, 신녕 장날에 시장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김준운은 그 길로 만세시위에 참여할 인원을 모으기 위해 곳곳을 돌며 독려하였다. 4월 6일 오후 10시경, 김준운은 왕산동(旺山洞) 개신교 교회당에 가서 허석(許石)에게 4월 8일, 신녕장터에 나가서 신녕공립학교 학생들이 아직 어리므로 이들의 만세운동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박필환의 영향을 받고, 김준운의 독려를 받은 신녕공립보통학교 학생 황정수(黃正秀)·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김해오(金海午) 등 4명은 4월 6일 오후 3시 30분경, 신녕면 완전동 노영수(盧永秀)의 집에 모였다. 황정수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집 마당의 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그 나무 밑에서 자신이 먼저 독립만세를 외치자 다른 학생들도 따라 외쳤다.
또 황정수·김호용·박칠성·김해오·조율이(曺·伊)는 밤 9시경, 신녕면 매양동(梅陽洞) 노상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황정수·김호용·박칠성·김해오 등 4명은 대한독립만세를 계속 외쳤다.” 】


이 일로 김준운은 일제로부터 징역 1년을 아들 김호용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당시 김준운은 65세 아들 김호용은 15세였다.


▲ 김준운의 손녀 김옥조(좌)씨와 손부 정화선씨가 이번에 제막한 구위준님의 작은 비석을 쓰다듬으며 오열하고 있다.


◇ 비극·가난 극복, 애족장 받아

김옥조, 정화선씨의 가족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과 극복을 모두 담고 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김준운은 일제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1년 만기 복역 후 출소를 했으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힘든 노후를 보냈다. 5년 뒤인 1925년 별세했다.


가장이 죽자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생활을 보냈다. 해방이 되었으나 이어진 6·25전쟁으로 가난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김호용은 4남매를 두었는데, 맏딸이 김옥조이고, 막내 아들이 김민(75)이다. 훗날 정화선씨와 결혼한 김민은 학창시절에 도시락을 싸가지 못한 날이 많았다. 배가 고파 맹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열렬히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했고, 그때 삼촌이 학비를 보태줘서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김민은 결국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영천시에서 공직을 퇴임했다.


1990년, 이들 가족에게 국가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부는 김준운의 공적을 세밀하게 검토한 후 ‘애족장’의 훈장을 수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70년 만에 보내온 정부의 작은 선물이었다. 그사이 이 독립운동가 가족은 국가의 도움 없이도 가계를 일으켰고, 국가 재건에 앞장섰다.


이 날도 자신의 조부가 아닌 다른 분의 제막식일지라도 기꺼이 참석해 감격의 눈물을 훔치며, 자그마한 비석을 보듬고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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