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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순례1 임고서원(臨皐書院)편
  • 기사등록 2019-07-26 23: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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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찬 기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자취를 따라서 영천시 임고면 임고서원(臨皐書院)에 가면, 오늘도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배우고 고결한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포은 정몽주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영천시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에 2012년부터 243억원을 들여 성역화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인근 효자리에는 포은 생가가 재현돼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역사문화 체험교육을 위한 임고서원 내 충효문화수련원은 국제적 인성교육기관으로 각광 받는다. 임고서원 입구에는 '동방이학지조(東邦理學之祖)'라는 커다란 돌비와 더불어 선죽교가 재현 돼 우둑 서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민족정신

포은 선생은 주자의 성리학을 조선에 정착시켰고, 이를 실천한 '학문과 충절의 위인'로 정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포은 선생이 고려말 위인으로서 실천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로 실질적 개혁을 이끌었다는 새로운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포은 선생은 '만고의 충신상' 외에 또 하나 부친상 때 시묘살이는 물론 모친상 때 관직을 멈추고 시묘살이 삼년상을 실천한 '효자의 표상'이다. 선생의 어머니 영천 이씨는 '백로가'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로가 ;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 청강에 이껏 씻은 몸 더러일까 하노라"



포은 선생은 태종 이방원과 죽음을 무릎쓴 역사적 라이벌이었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선생의 '단심가'는 기성세대들이 초등학생 적에도 줄줄 욀 정도였다. 단심가는 역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우리 노래'이고, 그 스토리는 역사대하드라마의 주된 소재이다.


포은 선생은 또 삼봉 정도전과의 깊은 우정과 처절한 배신을 겪었다. 포은과 삼봉과의 우정과 배신에 얽힌 스토리는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지은 '삼봉집'에는 '차운하여 정달가에게 부치다'(次韻寄鄭達可夢周)라는 시에 "지란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芝蘭焚愈馨) / 좋은 쇠는 갈수록 빛이 나네(良金愈光) /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共保堅貞操) /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네(永矢莫相忘)"라고 씌어 있다.


'우정~사랑~배신~죽음'에 이르는 스토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들의 주된 소재가 돼왔다. 각종 사료에는 포은 선생의 '사랑' 부분이 빠져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 극화한 작품들이 근래에 나오고 있다.



◇ 기상과 서정미 넘치는 작품들 남겨

포은 선생이 남긴 '포은집'에는 권1·권2에 시 295수, 권3에는 잡저·화상찬·명(銘)·제문·권자(卷子)·기·소 등과 습유·유묵을 수록하였으며, 권4는 연보고어와 부록이다. 연보고어에는 택(宅)·묘·비·서원·본전(本傳)·행장·갈음(碣陰) 등이 부재(附載)되었고, 부록에는 저자와 관련이 있는 문(文)·시부(詩賦)·용비어천가·서(書)·소·의(議)·제축고사(祭祝告辭)·제가기술(諸家記述) 등이 실려 있다.


선생은 문보다는 시를 더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웅혼하다는 평과 함께 실제로는 내재된 짙은 서정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회자돼 온다. 특히 중국·일본 등 외국에 여러 차례 내왕하여 외국인들과 서로 주고받은 시편은 당시 외교의 사실과 문화 교류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春興 (춘흥, 봄의 흥취) ;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밤 깊어 희미하게 빗소리 들려라) /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눈 녹아 남쪽 개울물 불어나니) / 多少草芽生 (다소초아생, 풀싹은 얼마나 돋았을까)"


永州故友 (영주고우, 영천의 옛 친구) ; "雲飛戀故丘 (운비연고구, 구름 흘러가는 고향언덕 그리워) / 露冷驚秋夕 (로냉경추석, 이슬이 찬 걸 보니 추석이로다) / 魚肥香稻熟 (어비향도숙, 물고기는 살찌고 맛난 나락 익어가니) / 鳥宿翠林稠 (조숙취림조, 푸른 숲 속에는 새들이 깃들이네)"



◇ 성리학자를 넘어서는 민족의 스승

고려말기 최고 등급의 문신, 성리학자, 정치가, 외교가, 군사전략가이자 작가. 1338년 1월 13일 (음력 1337년 12월 22일), 고려 경상도 영천군 (현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출생. 1392년 4월 26일(음력 4월 4일, 향년 56세) 고려 개경 선죽교(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특급시 선죽교)에서 사망.


초명(初名)은 정몽란(鄭夢蘭)·정몽룡(鄭夢龍),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추증 작위는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 아버지 연일정씨 정운관(鄭云瓘), 어머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영천이씨. 부인은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이씨. 포은 선생은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외에도 '포은집'(圃隱集)에 많은 한시(漢詩)를 남겼고, 서화(書畵)에도 출중.


포은 선생은 한민족 5천년 역사에 있어서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획기적이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고려 말기 새로운 이념으로서 주자학을 확립한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이다. 온건개혁파의 입장을 견지, 조준,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했다.


5부학당과 향교(鄕校)를 세워 학문을 진흥하고,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해 법질서를 확립코자 했다.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이성계와 함께 군대를 통솔해 외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했다. 일본 사신으로 가서 수백명의 고려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포로의 귀환은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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