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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순례2 ▶도잠서원(道岑書院)편 - 도화(桃花)는 지고 없어도 지산(芝山) 선생의 음성이 물결로 밀려오다
  • 기사등록 2019-08-13 17:52:14
  • 수정 2019-08-30 09: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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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찬 기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 선생의 넋이 서려있는 도잠서원(道岑書院)은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에 있다. 복숭아의 고을, 대창면은 영천시청에서 남쪽으로 승용차로 20분가량 가야하고, 용호리는 대창면소재지에서도 10㎞가량 더 가야 나온다.


면소재지를 지나 도잠서원을 찾아 나서면 어느새 산골에 접어든다. 도로는 얼마안가 넓지 않은 시골길로 바뀐다. 그래도 도잠서원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좁다란 길 양 사방이 복숭아밭이다. 봄철 이곳에 오면, 주변이 온통 '도화만발'(桃花滿發) 한다. 이날은 한여름 뙤약볕 아래 초록의 잎사귀가 하늘하늘 거리고, 그 사이에 속살을 감추려는 듯 늦복숭아들이 낯선 낯빛을 부끄러워하는 듯 옹기종기 숨겨져 있다.


그 길을 구불구불 한참을 올라가서야 용호리가 나온다. 마을 끝에 높다란 저수지 제방을 지나가면 비로소 버드나무 사이로 비치는 '도화담'(桃花潭) 물빛 위로 도잠서원의 당당하고 단아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구불구불하고 좁다란 시골길을 따라 지산 선생이 유유자적했고, 학동들이 선생에게 배움을 청하러 삼삼오오 달려왔던 그 길이라 생각하니 주변이 한층 정겹게 느껴진다. 선생이 처음 축조했다는 도화담의 잔물결을 보면, 지산 선생도 이 물결을 보면서 마음의 묵은 것을 씻어 내렸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시원해져 온다.



지산 선생은 왜 이토록 깊은 산골에 서원을 세웠을까. 이러한 물음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대사변과 더불어 선생 개인적으로 △오랜 귀양살이와 유배지에서의 후학 양성 △목숨 건 의병활동과 길지 않은 관직생활 △원고향인 영천으로의 귀향과 망중한 속 그의 마지막 교육열과 연구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면 좀체 알아채기 힘들다.


도잠서원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지산 선생의 고매한 품격과 언행, 그의 교육혼과 남겨놓은 저서들은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 국가의 기반이 송두리째 허물어졌던 중기 조선에서 국토 재건과 국가 개조의 발판을 놓는 시금석이 선생의 정신력의 바탕 위에 놓였다. 국가재건의 방법론 또한 일평생 순리와 충렬에 따라 살아 온 자신의 삶을 후학들이 보고서 스스로 따랐고, 그것이 학문으로 꽃 피고, 대개혁으로 수놓아진 것을 보면 선생의 위대함이 자못 이해가 된다.



◇유배지서 후학양성 '관서부자'
지산 선생은 15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1571년 부친상, 1572년 모친상을 연달아 치렀다. 1576년 전가사변(全家徙邊·온 가족과 함께 귀양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아 관서지역(현 평안도) 강동(현 평양시 강동군)으로 유배됐다. 그는 이처럼 가혹한 형벌을 당했어도 "운명일 뿐이다"면서 담담히 2,000리 길을 떠났다.


귀양살이 17년간 그는 그곳에서 학문의 증진과 교육의 확장으로 왕으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관서지역의 공자님,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때 그곳에서 제자 김육(金堉· 호 잠곡(潛谷)·조선후기의 문신·실학자)과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유배가 일찍 풀리지 않았던 이유가 불모지에서의 학풍의 진작이고 보면, 학문과 후학을 위한 선생의 헌신과 노고는 말로 이루 표현이 어렵다.



◇임진란 '의병창의' 혁혁 전공
1592년 음력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서애 유성용의 천거로 선생의 유배가 풀렸다. 선생은 명에 따라 관서지방에서 의병을 창의했다. 의병들은 평양성 탈환에 참여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선생은 당상관인 절충장군 용양위 상호군의 관직에 올랐다. 그 후로도 성주목사 등 여러 관직을 맡았는데, 전시의 관직은 오로지 목숨을 걸고 왜적을 무찌르라는 명령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가 임진란 초기에 관서와 영천을 오가면서 멸사봉공한 것은 그 시기와 거리상으로 보아 신기에 가깝다는 평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의병장과 무관의 직무를 수행했다. 선생은 후일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됐는데, 선생이 ‘임진란 공훈을 세운 의병장 내지 무관’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천서 망중한, 학풍의 완수
선생이 선대의 고향 영천 지산촌으로 되돌아 온 때는 60세인 1603년이다. 그는 관가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연못을 파고, 화초와 대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서 선생은 화창한 봄 햇살과 시원한 가을바람을 벗 삼아 한가롭게 산책하며 망중한(忙中閑)을 달랬다. 그 뿐 아니라 이곳에서 주자가례를 연구하고, 원근각지에서 모여 든 후학들을 교육했다.


선생은 '가례고증'(家禮考證) 등 저작을 마치고, 1608년 향년 65세로 별세했다. 운명의 순간에도 선생의 손에는 주자대전이 들려 있었고, "이 책이 반드시 이 늙은이가 없는 것을 서운해 할 것이다"는 유언을 남겼다.


선생은 참으로 임금이 붙여준 이름 '관서부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평생 유배와 죽음을 무릅쓴 전장과 오로지 교육혼을 불태웠고, 영남학파의 학풍을 세웠다. 후일 제자 김육이 영의정에 올라 '대동법'을 시행하는 대개혁가가 되는 등 관직에 올랐고, 제자들은 국토 재건과 국가 개조의 과업을 매진했다.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들은 김육은 관직을 멈추고 지산촌으로 달려와 3개월간 시묘살이를 할 만큼 혈연보다 진한 사제의 정으로 선생을 기렸다고 전한다.



◇440년간 꽃 피운 '사제의 정'
지난 9일 지산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조순 교수(대구가톨릭대·역사학)가 도잠서원을 찾았다. 조순 교수는 창녕조씨 지산 선생의 후손이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바람마저 드문 날씨임에도 도잠서원에서는 생수 한 통으로 목을 축이고, 마루 그늘에 앉아 대화하기에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조 교수는 지난 제3회 지산조호익선생학술대회에서 청풍김씨 문중과 이곳에 제자 김육 선생의 위패를 모셔와 함께 제향하기로 약속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는 향후 지산 선생의 학문을 재정립하고,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인 선생의 유품들을 영천박물관이 세워지면 당연히 영천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조 교수는 또 지산선생기념사업회 조준걸 이사장이 영천시장학회에 10억원의 장학금을 조성해 기부하면서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겼던 것을 은둔과 실천을 미덕으로 여겼던 지산 선생의 성품과 결부해 설명했다.


조순 교수는 가끔 제자들을 데리고 도잠서원을 찾아 체험학습을 한다면서 "최무선과학관을 기점으로 10㎞ 반경 안에 만취당(중요민속문화재 175호), 유후재와 옥비, 지산고택, 지산서원(도화담), 영지사가 오밀조밀 분포한다. 또 복숭아의 고장으로 자리 잡은 대창면 복숭아의 시원 스토리가 담긴 곳이 선생이 만든 도화담이다"면서 "영천시가 이러한 문화유적들을 묶고, 지산서원 인근에 청소년수련관을 세워 학생, 시민, 근로자들을 초대해 역사와 인성을 교육하고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주창했다.



이날따라 도잠서원에서 바라다 본 도화담에는 지산 선생의 올곧은 성품과 드높은 학덕을 보여주듯 물결 위로 역력한 푸른빛이 유달리 반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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