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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치졸한 장세용 구미시장 대신 제가 사죄드립니다.”◀장지수 발행인
  • 기사등록 2019-09-26 21: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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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신문/영천투데이 장지수 발행인


참 부끄럽다. 본향이 같다는 것이!

장세용(더불어민주당) 구미시장이 지난 18일 구미코에서 열린 구미공단 50주년 기념 홍보영상(6분)을 공개하면서 공단역사를 왜곡했다. 공단 변천사를 소개하면서 구미공단을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쏙 빼고 대신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만 끼워 넣어 구미시민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이날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철우 경북 도지사, 황규연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했지만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의 아버지다. 구미공단의 전설이다. 구미공단은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시작점이다. 이같은 공단 창시자를 지우고 뻔뻔스런 문(文)까지 끼웠으니 애비 없는 자식을 낳은 결과다.


장(張) 市長은 실수로 누락시켰다고 항변하지만,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仰天大笑)할 일』이다. 장 시장은 본(本)이 필자와 같은 인동(仁同)이다, 때문에 내가 구미시민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구미시민 여러분! 인동장(仁同張)씨 가문에 이런 작자를 둔 것에 대신 제가 사죄드립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장세용 시장의 낯부끄러운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다. 민원 차 찾은 왕산 허위(許蔿)  선생의 후손(종손) 허경성옹(93)께 고성과 막말로 대했다. 알고 보니  장 시장이 왕산 허위선생의 누각이 있는 ‘왕산(허위)광장’을 지난 6.13지방선거 당선 후  취임과 동시에 ‘산동광장’으로 바꿔 버렸다. 또 ‘왕산루’를 ‘산동루’로 바꿔 허위 선생의 흔적도 싹둑 지워버렸다.


왕산광장과 왕산루 명칭은 남유진 전 구미시장 때 주민공청회에서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아 설립했다. 주민들이 세운 이같은 민족의 역사를 자신의 개인감정을 앞세워 치졸하게 지운 것이다. 이 때문에 후손 허 옹이 장세용 시장을 찾아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장 시장이 고성과 삿대질 등 막말로 허 옹을 문전박대해 내쫓듯 외면했던 것이다.


완산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은 또 누구시던가! 독립운동으로 왜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직한 1호 독립유공자에, 대한민국 건국훈장(1962) 추서 제1호다. 독립운동 대한민국 3대 명문가가 아니던가? 허위 선생 직계 아래로 1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과 함께 대한민국 독립운동 3대 명문가다.


구한말에는 거병을 일으켜 창의정용군의 총 대장으로 항일에 앞장섰다. 더군다나 허위 선생의 후손 허영식 장군은 이육사의 時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탄 초인」의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허위 선생의 위업을 한갓 쓰레기 지식으로 지난 지방선거 때부터 박정희 흔적 지우기와 함께 역사왜곡 질을 하다니 장(張) 시장과 같은 본(仁同張)인 필자가 정말 얼굴을 들 수 없다.


순국선열의 영혼이 다시 깨어나 “네 이놈 당장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고함칠 일이다. 장 시장이 이런 이유가 무엇일까? 인동장씨 가문에 같은 독립유공자가 있다. 바로 장진홍(張鎭弘, 1895~1930-독립운동서훈 3등급) 선생이다. 장진홍 선생은 1918년 비밀항일 결사단인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해 청년규합과 훈련, 3.1운동 당시에는 일본의 만행 자료수집, 비밀결사조직 및 신문지국운영 등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서오다 폭탄을 제조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다 잡혔다. 193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수감 중 자결했다.


만약 장 시장이 왕산 선생을 지우고 같은 본(仁同張)인 장진홍(張鎭弘)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라면 “당장 그 입 다물라! 조상의 이름에 그 더러운 세치 혀를 굴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남을 끌어내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그 치졸함은 우리 인동 가문의 DNA가 아니다.



▲ 장세용 구미시장

장 시장님! 당신이 왕산 선생을 아느냐! 1855년(철종 6)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난 허위 선생은 상주와 김천, 충청도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산의병(김천의병)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의병 해산 후 1899년 45세가 되던 해 관직에 진출해 원구단참봉을 시작으로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평리원재판장과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한 충신이다.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을 때 허 선생은 이상천·박규병 등과 배일 통문을 작성했다가 최익현과 더불어 일본 헌병대에 4개월간 구금된 경험 때문에 강원도의 이인영 부대 등과 협의,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전국의 의병들을 경기도 양주에 모았다. 여기서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관할하는 진동창의대장이 되었다가, 1908년 1월 조직을 정비하면서 군사장으로 일본군 격퇴에 나선 인물이다. 그러다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허위 선생은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이란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짧은 51세로 순국한 난세의 영웅이었다. 허위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 후 임은동 허씨 일가는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나 전가족이 항일전쟁에 참전한 애국 충절의 가문이 아니더냐? 1966년 11월 26일 정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로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도로를 허위 선생의 호를 따서 ‘왕산로’라 붙였다.


후손 허형식 장군은 또 누구이던가! 1939년 당시 30세로 동북항일연군 총참모장 겸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해 만주와 하얼빈 일대를 진동시킨 항일전쟁의 영웅이다. 그는 일본군에게 빼앗은 말과 무기로 전부대를 기마부대로 만들었던, 이육사의 시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온 초인의 실존인물이다. 안동 출신의 이육사 시인은 17세 때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과 결혼한 다음 처가에서 가까운 화남면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는 등 우리지역 영천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허 장군은 1942년 8월 9일 당년 33세에 흑룡강성 경안현 청봉령에서 일본군과 만주군토벌대의 포위를 뚫다가 부대원을 대피시킨 후 혼자 교전 중 전사했다. 장군의 목은 효수돼 시내에 내걸리고 시신은 짐승먹이로 버려져 마지막 남은 오른쪽 다리하나만 수습됐다. 그는 단지 만주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고향에서도 잊혀진 사람이 됐고, 좌익계열의 무장독립운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장세용 시장은 더 이상의 무식하고 무례한 짓거리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더는 폄하하지 말라! 장세용 구미시장께 명한다. “당신의 성을 갈던지 아니면 실수라고 변명하지 말라!, 구미시민과 허위 선생 후손께 엎드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라!, 그리고 모두 원상태로 돌려놓아라!” 아니면 구미시장 직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2)』 『독립운동사자료집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독립운동사3(국사편찬위원회, 1967)』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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