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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찬수첩] 영천서 사라진 왕평의 흔적 찾기
  • 기사등록 2019-11-29 16: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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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병찬 기자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 왕평(王平·이응호·李應鎬) 선생에 대한 영천시의 무관심과 홀대가 여전하다. 영천시가 왕평가요제를 24회까지 이어오면서 올해는 1억1,500만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도 왕평의 실체에 대한 재조명은 전혀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0여년 전부터 왕평 재조명을 추진했던 시민단체에 따르면, 숭렬당 인근에 남아 있던 왕평(王平·이응호·李應鎬) 생가가 2011년 8월 완전히 철거됐다. 당시 시민 4,200여명 서명을 받아 영천시에 보존을 간곡히 청원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왕평(생가) 사진, 호적, 기사 스크랩을 확보해 ‘왕평기념사업회’를 추진했다, 하지만 영천시는 이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바람에 인간적 모멸감을 느꼈다고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분위기다.


영천시는 또 몇 년 전 왕평생가와 관련 4,200만원의 용역을 벌였고, 문화비평가인 이동순 교수의 왕평논문을 전달받았으나, 주먹구구식 관리로 이 같은 자료가 남아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시민단체는 생가의 철거로 왕평의 흔적이 영천에서 대부분 사라졌다고 통탄하면서 영천시가 왕평가요제를 이어오는 것은 뻔뻔스러움의 극치이자 시민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천시는 왕평가요제를 개최하면서 방송사에 송출비 등의 명목으로 제작비와 홍보비를 대주고 있다. 왕평가요제는 영천예총이 주관하는 보조금 지원사업인데 자부담이 전혀 없고 사실상 방송사에 재위탁해 행사를 한다.


제24회 왕평가요제가 열린 지난 9월 29일 영천강변공원에는 수천명의 관람객들이 몰려와 왕평가요제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는 영천이 왕평의 출신지로서 역사적 사실이 엄연하고, 그러한 내용이 관람자들의 마음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이처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역사적 실체인 왕평 생가가 보존돼 왕평가요제와 연계됐다면, 대중을 모아들이고 감동을 주는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게만 되면, 영천시가 방송사에 송출비다 뭐다 온갖 제작비를 대주며 왕평가요제를 치를 게 아니라 방송사에서 방영비를 영천시에 주면서 송출권을 받아가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천시 담당자는 본지의 자료요청에 처음에는 “왕평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가 재차 묻자 “그건 아니다. 내가 모른다고 했지 왜 없다고 곡해하느냐”고 되레 화를 냈다. 왕평기념사업 추진에 무관심과 홀대로 일관했던 영천시의 문화행정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본지의 조사에 따르면, 왕평은 1908년 3월 15일 영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응호(李應鎬), 아명은 두희(斗熙)였다. 모친은 그가 5세 때 사망하였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영천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현철이 설립한 조선배우학교의 1기생으로 들어가 연기 수업을 받았다.


1929년 창립된 극단 조선연극사의 단원으로 극본을 썼다. 이후 연극시장, 연극호 등의 극본 작가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가 작사한 「황성의 적(跡)」(후에 ‘황성옛터’라는 제목으로 불림)은 1930년경 조선연극사의 순회 공연 중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회를 작곡가 전수린이 먼저 멜로디를 만들고 왕평이 작사한 가요로, 무대의 명배우 겸 인기가수인 이애리수가 불러 히트했다. (왕평이 부르지는 않았다) 이 가요는 조선인에 의해 창작된 본격적인 트로트다. 1932년 4월 빅타레코드로 출반되었고, 5만 장 판매라는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왕평의 전체 작품 수는 도합 195편 정도이다. 이중 유행가 장르가 115편, 서정소곡 3편, 째즈송 3편 그리고 민요, 속요, 신민요 33편, 합창과 행진곡이 5편이다. 극과 극영화 대본 30편, 넌센스 21편, 스켓치와 만담 5편 등이 있다. 그가 가사를 쓴 대표작으로는 「황성의 적」, 「님 그리워 타는 가슴」(1932), 「항구의 일야」(1933),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1936) 등을 꼽을 수 있다.(민족대백과사전 중)


왕평은 불과 33세에 심장마비로 무대 위에서 사망했다. 동반자였던 만담가 나품심(羅品心)이 머리를 풀고 극진한 장례를 준비했다. 나품심은 왕평의 유골을 안고 부친 이권조가 당시 살고 있었던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로 내려갔다. 그의 묘는 일경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봉분이 없는 가매장(假埋葬) 상태로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된 처연한 무덤이 되고 말았다.(문화비평가 이동순의 칼럼 중)


이권조는 일경이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해 왕평을 찾아내라는 괴롭힘 때문에 영천에서 청송으로 이사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왕평이 5~7세 때 청송에서 살았다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영천의 시민단체는 영천시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왕평을 애국지사로 인식해 정부 훈장 추서를 추진할 뜻이 결연한 채 오늘도 한숨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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