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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제주도 탐라순력도 대탐방2▶천년 이어온 가락을 병와금으로 노래하다
  • 기사등록 2020-02-13 22:50:30
  • 수정 2020-02-18 22: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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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봇원된 제주목관아 전경(사운데병와 이형상 선생)


[강병찬 기자]
제주목사였던 병와(病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이하 존칭 생략) 선생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보물 제652호 중)와 병와금((病窩琴, 국가민속문화재 제119호 중)만 들고서 쫓기듯 육지로 향하는 배에 오른 때는 1703년 5월 쯤이다.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은 불과 15개월. 조정에서 목사로서 유배자(오시복 전 이조판서로 추정)를 도왔다는 이유로 탄핵으로 그를 파직 했으니 그 지엄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형상의 기억이 한라를 휘감은 구름처럼 흘러갔다. 그를 태운 나룻배가 제주를 떠나 바다로 나오자 제주가 돌섬 크기가 됐지만, 한라는 더욱 솟아올라 보였다. 보길도를 돌아 제주도로 돌진해가는 거센 물결이 그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이형상은 멀어지는 제주를 바라보며, 탐라순력도 마지막 장을 펼쳤다.


한라장촉으로 시작되는 탐라순력도는 원래 40쪽으로 제작됐다. 그런데 화공 김남길은 제주에서의 순력(巡歷) 활동을 그림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이형상이 파직당해 돌아가는 배에 올라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상상해 보길도에서 바라 본 제주도를 제일 마지막 장에 그려 붙였다. 이것이 ‘탐라순력도’의 마지막을 장식한 ‘호연금서’다. 탐라순력도 41폭 그림 중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호연금서에는 이형상에 대한 심심한 존경심이 배여있다.


이형상은 거문고를 꺼냈다. 나중에 '병와금'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거문고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저절로 말라죽은 박달나무로 만들어졌다. 오씨라는 노인이 이형상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오씨 노인은 다름아닌 유배자 오시복 전 이조판서로 추정된다.


이형상이 제주 목사의 임기를 마치고 영천으로 돌아올 때 단금과 시초로만 안고 되돌아왔는데, 이 단금의 명(銘)을 붙이고 거문고 뒷면에 ‘한라산의 고사목 단목과 향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명을 붙이니, 산은 삼신산 중의 하나요, 단나무는 태백의 여종인데 내가 천고의 뜻을 가지고 아침 저녁 육현과 함께 노니네(檀琴, 以漢拏山自枯檀香爲琴 山是三神一 檀爲太白餘 吾將千古意 晨夕六絃於)'라는 금명(琴銘)을 직접 새겼다.


▲ 지난 1월31일 본지 제주탐방때 1994년 탐라순력도 첫 영인본을 제작한 강창언 제주도예촌 주인(왼쪽)이 보물652호 소장자인 이임괄(영천, 이형상 10대손)씨에게 직접 순력도의 우수성을 설명하고있다.


◇파직을 무릅쓰고 유배자의 지혜를 들은 이형상
제주목사 이형상은 제주도로 유배 온 오시복(1637~1716)을 자주 만났다. 그는 이형상 보다 17년 앞선 인물로 남인에 속했다. 오시복은 숙종 때에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 호조판서(현 경제부총리), 이조판서(현 행안부장관)를 지냈다. 이형상은 오시복에게 정책의 자문을 구했고, 물심양면으로 그와 교류했다. 탐라순력도의 제작도 오시복이 이형상에게 '이토록 장엄한 광경을 화폭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다고 오시복 간찰에 나와 있다.


목사가 죄인인 유배자를 도왔다는 것이 결국 화근이 됐다. 하지만, 이형상은 추호의 후회나 망설임이 없었다. 현대의 행형학적 기준으로보면, 이형상은 가장 바람직한 행정가이겠지만, 그때는 엄연한 봉건시대, 조선 후기였다. 이형상이 보편타당한 인류애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300년 이상을 앞서간 인물임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형상은 1703년 이른 봄에 제주도의 진귀한 특산물을 모아 배에 실어 한양에 보냈고, 그것을 받게 된 조정이 파면문서가 도달하지 않은 것을 확인, 그제야 파면 사실이 제주에 전달되자 이형상은 황급하게 제주를 떠났던 것이다. 이형상은 내직 4년, 외직 8년 등 총 12년간만을 봉직했다. 당시 남인들과의 교류가 많아 남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서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조정의 당쟁과 직급 싸움에 회의를 가졌고, 이를 크게 뛰어넘어 거리낌없이 학문과 교류에 나선 인물이다.


이형상은 일반적으로 청백리에 선정된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역학 · 천문 · 지리 · 역사 · 예악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실학자로도 평가된다. 탐라순력도를 확보한 후 이형상에 대한 연구를 했던 제주도는 병와 이형상을 17세기 대표 실학자로 재조명하고 있다.


본지 탐라순력도 대탐방에 보물 제652호 이형상수고본을 소장 관리하고 있는 이임괄씨(전 영천향토사학회장)가 동행했다. 이임괄씨는 과거 제주도가 국가적 문화재를 사사로운 방식으로 매입해간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제주도가 탐라순력도 진본을 확보해 국립제주박물관에 보존하면서, 탐라순력도를 활용해 제주목관아의 완성, 책과 이형상 목사에 대한 대대적인 학술적 진흥, 책의 꾸준한 활용과 이형상 목사 선양, 최근 국보 신청 등을 접하면서 제주도와 영천시의 우호와 친선 차원에서도 더 많은 교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나머지 제주 유물들도 제주시가 진정한 마음으로 필요로 한다면, 기증하겠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청백리이자 대실학자 이형상 제주목사가 남긴 유물을 제주도와 제주도민, 국가와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차원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국보 보다 더 귀한 제주와 영천의 우호와 친선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제주도예촌을 운영하고 있는 강창언씨는 이형상과 탐라순력도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탐라순력도는 1979년 2월 8일 보물 제652호로 지정돼 자신의 존재를 드디어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강창언씨는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인 '규장각'을 찾아가 탐라순력도 탐색에 나섰다. 당시 보물 목록은 물론 장서 목록이 전산화 돼 있지 않았다. 특히 대다수의 박물관은 소장품 목록을 보안사항에 부치는 관례가 있다. 그는 며칠 꼬박 걸려 담당자를 만났고, 그 담당자에게서 조잡하게 제작된 탐라순력도 책을 확인했다. 그는 그 담당자에게 "탐라순력도 진본이 지금 어디있느냐"고 다그쳐 물었으나, 결국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여러 수소문 끝에 탐라순력도 진본이 있는 영천을 찾아왔고, 당시 소장자를 만났다. 그는 소장자에게 큰 절을 올려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진정어린 마음으로 열람과 촬영을 요청해 탐라순력도를 정밀하게 촬영한 것이 1994년이다. 이렇게 해서 탐라순력도의 첫번째 영인본이 출판됐다. 원본 크기와 같은 그 영인본은 처음에는 500부가 발행됐다. 하루이틀만에 영인본 500부가 동이 났다. 제주도가 몇 차례 더 인쇄를 해 5,000부 가량 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순력도는 이렇게 제주도민, 더 나아가 국민들과 화려한 만남을 갖게 됐다.
그러나 탐라순력도 1차 영인본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희귀본이 됐다. 강씨는 지난 2월 1일 본지와 함께 이임괄씨가 내방하자 하나 남은 탐라순력도 1차 영인본을 이임괄씨에게 선물로 내줬다.


강창언씨는 "제주도(당시 제주시)가 영천의 당시 소장자를 설득해 탐라순력도를 매입해오는 과정에서 공공성을 확대하지 못한 부분이 다소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1차 영인본만으로도 학술적 연구가 충분한 데 영천에 있는 진본을 굳이 매입해 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서로간 신뢰가 쌓이고 우의가 다져지면, 언제든지 빌려와 전시하고, 교류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강창언씨는 또 제주도가 탐라순력도를 보존처리를 하면서 비단바탕을 종이바탕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제주도가 최근 탐라순력도를 국보로 신청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든 도움이 될 일을 찾았다. 그는 기성 미술가들이 "탐라순력도가 회화적 측면에서는 두드러진 점이 없다"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기성 미술가들은 탐라순력도가 기록적인 의미를 강조한 나머지 그림 자체로는 훌륭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강창언씨는 탐라순력도를 수도 없이 관찰하면서 탐라순력도는 정면에서 봐야하는 그림이 아니라 상단 위에서 75도 각도로 봐야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가가 높은 곳에서 장면을 관찰했으므로 그 기준에서 탐라순력도를 바라보면, 산과 들과 건물들의 입체감이 펄펄 살아나는 독특한 구조가 된다. 그는 "이러한 그림 기법은 이형상이 실학의 선구자로서 미적 탁월성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세계미술사에도 유례가 없는 독특하고 입체적인 것이라며, 제주도가 문화재청에 별도 의견을 제출해 준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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