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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선생 재조명 본격화◀영천문화유산연구회·병와연구소·경북대 퇴계연구소 앞장 - 정병호 교수, "병와선생 유산 워낙 방대하고 어려워 국가·지자체 나서야"
  • 기사등록 2020-12-08 12:18:41
  • 수정 2020-12-08 12: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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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 이형상 선생 재조명 본격화한다.

영천문화유산연구회·병와연구소·경북대 퇴계연구소 앞장

정병호 교수, "병와선생 유산 워낙 방대하고 어려워 국가·지자체 나서야"

▲ 좌로부터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정병호 소장, 병와연구소 박규홍 소장, 영천문화유산연구회 안재준 회장


[장지수 기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년~1733년)선생에 대한 재조명을 위해 영천문화유산연구회(회장 안재준), 병와연구소(소장 박규홍),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소장 정병호)가 한자리에 섰다. 올해 5월 '병와학연구소' 발족에 뜻을 모은 후 7개월여 만이다. 앞서 이들은 지난 11월1일 정식으로 '병와학연구소' 를 발족한바 있다


이들은 지난 7일 경북대학교에서 ‘학술 및 교육 교류 협약’을 맺고 병와(甁窩)선생에 대한 재조명을 본격화하고있다.



병와 선생은 제주도가 국보로 신청한 ‘탐라순력도’를 비롯한 보물 652호 '이형상수고본'을 영천시 호연정에 남긴 분이다. 이번 협약으로 이들 3개 단체가 퇴계와 병와와 영천문화에 대한 연구 및 교육활동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향후 관련 학술대회 개최, 교육 프로그램 개발, 도서 간행, 유적답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병와 선생은 최근 조선 후기 고위관료를 지낸 성리학자로서만이 아니라 △17세기 실학을 정립하고 △청백리를 실천했으며 △민초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인권운동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발휘한 국가적 위인 중의 한 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병와 선생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28세 때인 1680년(숙종6) 별시 문과에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경주부윤과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은퇴 후 대부분의 생애를 경상북도 영천시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했다. 별세한 뒤인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에 선정됐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병와선생이 제작하고 보존한 탐라순력도를 지난해 말 국보로 신청해둔 상태다. 또 영천에 남아 있는 나머지 서적류들이 희소성과 내용에 있어서 탐라순력도보다 더 높은 가치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평가다.


병와 선생은 성리학은 물론 역학 · 천문 · 지리 · 역사 · 예악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실학자로도 평가된다. 저서로 『병와문집(甁窩文集)』 · 『둔서록(遯筮錄)』 · 『강도지(江都誌)』 · 『예학편고(禮學便考)』 · 『악학편고(樂學便考)』 등 60여 종 2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그중 중요한 10종 15책만을 묶어 보물 제652호가 지정됐다. 경북 영천에 남아 있는 보물의 수량이 국가 지정 단일 보물로서는 최다로 알려져 있다.


퇴계연구소 정병호 교수는 “병와 선생이 남긴 서적류는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매우 소중한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어려워 연구를 늦추다가는 10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면서 “악학습령(병와가곡집)만해도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 이런 일은 국가와 지자체에서 나서서 대대적인 학술진흥을 해야한다. 그 전에 민간에서 뜻을 모아 하나하나 해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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