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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럽] 논개(論介) 무덤의 진실(전북 장수군-경남 함양군-일본 게야촌) 세곳 존재 - [김문길 박사] 한국의 육조(六助) 표기는 육개(六介)가 맞다.
  • 기사등록 2020-12-25 21:53:19
  • 수정 2020-12-25 21: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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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논개(論介) 무덤의 진실, ▶전북 장수군-경남 함양군-일본 게야촌 세곳

[한국]-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로운 여인

[일본]-후쿠오카 게야촌에 왜장 六介·論介 축제 왜?

[김문길 박사] 한국의 육조(六助) 표기는 육개(六介)가 맞다.


▲ 본지 칼럼니스트 김문길 박사(학술문학 박사), 부산외대 명예교수, 혀)한일분화연구소장, ·


본 기사는 국내에서는 논개의 존재 여부를 최경회의 삶을 기린 [일휴당실기] 에 근거해 한국인물사를 기본으로 구성했으며 논개의 실존인물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서의 논개 무덤이 있는것을 발견했고 또 그 무덤 역시도 실제 사실묘인지 명확한 역사고증을 하지는 못했음을 밝혀둔다. 다만 논개의 무덤이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그리고 일본 게야촌 세곳에 있다는 사실만 전한다.<편집자 주>



▲ 전북 장수군 논개묘역 동상


◆[국내에서의 논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논개(論介) 생가 안내 표지판에 논개는 1593년(선조26) 남편인 최경희(崔慶會) 현감을 따라 2차 진주성싸움에 참전했다가 패전한 남편이 자결하자 기생으로 가장해 왜군의 승전파티에 참석한다. 여기서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진주 남강 의암 바위로 유인해 껴안고 투신한 의인으로 표현돼 있다.


이곳을 장수군이 농촌전통테마파크 관광지로 조성해 논개의 의인성을 높이 알리고 있다. 논개의 성씨는 주씨. 1574년(선조 7) 9월3일 전북 장수군 대곡리 주촌에서 부 주달문(朱達文)과 모 밀양박씨 사이에 나름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지금의 논개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오동제) 축조로 수몰돼 나중에 해발 400m인 이곳으로 옮겨왔다.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에는 논개의 영정을 모신 논개사당(전라북도기념물 제46호)이 있다.<두산백과> 한민족 대백과에는 논개를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로 적었다.


반면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최경희(崔慶會) 장군의 묘소 뒷편에 나란히 논개의 묘소가있다. 이곳 역시 전북 장수군과 같이 성역화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처럼 논개의 묘소를 두고 경남 함양과 전북 장수군에 이어 일본 후쿠오카(福岡) 게야촌(毛谷村)까지 서로 논개의 무덤을 두고 진의여부 논란을 벌이고있다.



▲ 논개가 일본장수 육개를 끌어안고 투신한 진주 남강 축석루 아래 바위(의암)


◆논개는 관기인가?


논개가 기생이라는 근거는 1593년(선조 26년)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던 현감 최경희(崔慶會(1532~1593)의 첩이 논개라는 기록에서 시작된다. 당시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 에 「최경회가 자결한 날 최경회의 부실(副室)이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는 구절에서 기초했다.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됐다.


논개의 성씨는 주씨. 이들 기록에 의하면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 부자인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현감이던 최경회다. 현감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석방했다.


이를 기화로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최경회를 추종해 관비로 남게된다. 장성한 논개는 19세의 나이에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 의병장이된 남편 최경회를 뒷바라지하게 됐다는 전개다. 이때 논개는 진주성 2차 싸움에서 패전한 남편의 자결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편을 복수한 히스토리다. <한국인물사 중>




◆논개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왜장의 존재


한국 인물사에서 주장하는 논개와 관련한 왜장은 한동안 밝혀지지 않았다가 1960년대부터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 의해 사무라이로 발탁된 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이름을 바꿔 임진왜란때 철포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함경도에서 죽었다는 설과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양론이 있지만 2차 진주성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는 등 일본에서는 논개와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영웅화를 가시화 했다. 지금도 현존한다. 이 때 일본사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영천의 노학자 김문길 학술박사(철학박사)가 다음을 연구조사 발표해 논개의 일본 역사성을 재조명해 관심이 높다.




▲ 필자가 발견한 일본 게야촌에 있는 녹개와 육개의 무덤


◆김문길 박사의 일본 현지 연구조사기록


논개(論介), 말쟁이 라는 의미로 일본 육개가 붙여준 명칭

진주 남강에서 죽은 왜장 육개(六介)와 논개(論介)의 진실

왜장 육개와 논개의 이름에서 개(介)의 의미

육개는 조선에서 죽지 않고 논개와 일본에 갔다?-논개 무덤 일본에도 발견



경남 진주(함양군)에서는 지금도 논개(論介) 축제가 국가 사업으로 유명하다, 진주뿐 아니라 전북 장수군에서도 논개는 우리한민족의 자랑거리다. 그런데 매년 일본 후쿠오카(福岡) 게야촌(毛谷村)에서도 왜장 육개(六介)를 기리는 축제가 유명하다. 왜장 六介의 축제는 우리가 탓 할것 아니지만 논개 축제와 겸하고 있다는것이 문제다.


六介와 論介는 남강에서 죽지 않았고 둘 다 살아 일본에 돌아왔다는 축제. 살아 돌아와 62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당시 가문서(家文書)가 발견됐다. 일본 사람들은 六介와 論介의 무덤을 나란이 만들어 놓았다. 일본 육개의 후손들이 말하기를 남강물이 얼마나 깊고 물결이 강한지 모르지만 우리 선조 六介는 키가 6척이나 되고 세도오하시바다를 육지와 같이 건너다니는 인물이었으므로 남강에서 죽지 않았고 論介 마저 데리고 와 한평생 살았으며 우리가 13대 자손이라는 주장이다. 자신들의 선조 육개를 우상화하고 있다.


일본사를 공부하는 본 필자로서는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六介의 자료를 찾아 분주하게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六介는 장군이 아니다. 일본사람들의 주장대로 키가 6척이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문헌은 찾았지만 또 그는 사무라이 가문도 아니다. 동북(東北) 지방에서 게야촌(毛谷村)으로 쫓겨온 랑인(浪人)에 불과했다.


랑인은 당시 히닝(非人)에 속한 민족이다. 조선 계급사회 백정(白丁)과 같은 신분이다. 다만 그는 키가 육척이나 되고 힘이 센 장사란 이유로 육조나 육개로 불리며 임진정유전쟁때 파견된것은 사실이다. 임진정유전쟁때 파견된 왜군들은 통솔자 사무라이 장군 외에는 이름도 성도 없었던 인물들이 많다. 일본 평민들은 성과 이름을 가진 것은 불과 100여 년 전 명치유신이 일어나서 호적법이 생긴 이후 부터다.


임진 정유전쟁때는 사무라이들만 이름을 가졌다. 전쟁에는 반드시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가큰사람은 六介, 눈이 큰사람은 目介, 말꾀나 하는 사람은 論介라 했다. 六介 손에 끌려온 論介는 말 꾀나 하는 여인이로 六介가 붙혀준 명칭이다. 임진전쟁당시 왜장들은 거의 六介라 칭했다. 오카야마현 비전시 카가도촌(岡山縣 備前市香登村)에 있는 코무덤을 만든 왜장도 이름이 六介다. 六介가 너무 많다보니, 자기 동내 이름을 따서 게야촌에서 태어난 육개는 게야촌 육개라하고, 전리품으로 코·귀를 잘라간 육개는 카가도촌(香登村) 육개라 했다. 논개는 당시 이같은 일본의 소리 명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임진왜란시 파견한 병사는 장군 몇사람제외하고는 전부 키가 크다든가 힘센자들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는 장군 중에 큰 장군 게야촌 육개를 論介가 죽였다고 전한다. 사실은 논개가 죽인 장군은 이름있는 왜장이 아니다. 임진정유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히데요시는 군사가 부족해서 여러 지역에 농민들을 출병시켰다. 힘이 센 용장들은 대부분 이름을 붙혀 파견했다. 그 이름 중 六介가 많았다. 그러나 이름도 성도 없는 힘센군인들이 더 많았으므로 논개가 죽인 육개는 어느 육개인지 알바없는 처지다.


따라서 진주의 의여(義女)·의기(義妓)라 할까 이름도 다양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진주 論介는 웅변이 좋고, 학식이 있다는 이유에서 육개가 붙혀준 이름으로 본 필자는 일본고사를 중심으로 확신한다. 개(介)자는 일본사람들은 뛰어난사람를 지금도 개자를 붙힌다. 한국에서는 논개가 태어날 때 좋은 징조에서 얻어진 이름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육개가 술한잔 먹고 논개의 유창한 말솜씨에 말쟁이라 해서 붙혀준 명칭이다.


일본사람들은 지금도 노래를 잘하는 자는 창개(唱介)라 한다. 일본에서 육개의 문서와 논개의 무덤을 필자가 찿았다. 하지만 논개와 육개가 살아서 일본으로 건너가 함께 살았다는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논개의 무덤을 화려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개의 무덤이 한국과 일본에서 세곳에나 존재해 의심되는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살아있는 자들이 왜곡하기 때문이다. 개(介)를 버리고 조(助)를 쓴 왜장의 무덤이 후쿠오카 게야촌에 논개 무덤과 나란이 있다. <사진>


[일본사 한일관계사 전공 학술박사·철학박사 김문길]








남강 촉석루에서 정약용은 논개의 흔적을 이렇게 읊었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 숱한 세월 흘러, / 붉은 누각 우뚝이 /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 가인의 춤 추는 모습 비추었고, / 단청 매긴 기둥엔 /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 전장터로 봄바람 불어 / 초목을 휘어감고 / 황성에 밤비 내려 /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 남아 있는 듯 / 삼경에 촛불 밝히고 / 강신제를 올리네.


▲ 경남 함양군 최경회의 묘 뒷쪽에 놓여있는 논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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