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칼럼] 김문길 박사 일본 속 조선역사 탐방②, 임진전쟁 포로로 잡혀간 유안(劉安)-유필(劉泌) - 유안-유필의 선조 유전은 영천인, 영농 기술로 일본 근대 부강을 일군 인물
  • 기사등록 2021-01-08 16:12:27
기사수정


▲ 본지 칼럼_김문길 부산 외국어대 명예교수(철학/학술학 박사)


임진 정유전쟁 포로로 잡혀간 유안(劉安)과 유필(劉泌)


유안·유필의 선조 유전(劉筌)은 영천사람

유필의 농어업기술, 일본 대국을 만들었다.

왜장이 베어간 조선인의 코·귀 무덤 발견


▲ 영천시 녹전동 유씨 선령 유전(劉筌)의 묘>


유안(劉安)-유필(劉泌)의 선조 유전(劉筌)은 영천사람


한국성씨 가운데 모금도(劉) 유자인 유씨가 희성이지만 인구는 꽤 많다. 국가에 기여 하는 바도 많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근대 부강을 일군 인물이 유안(劉安)-유필(劉泌)이다.


유안-유필의 업적을 논하기 전 영천의 인물인 그의 선조 유전(劉筌)이 어떤 인물인가를 먼저 찾아보자

유전은 중국사람으로 고대 중국을 이끌어 낸 유방(劉邦)유비(劉備)의 자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살았다. 한국에 들어온 연대와 학설은 양설이 있다. 하나는 810년 신라 원성왕38년 영천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 살다가 후손이 번성함에 맏 자손은 거창에서 벼슬을 하고 거창 유씨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후손들이 국가에 부름을 받아 강릉에서 살다가 강릉 유씨, 백천 유씨의 각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다. 오늘날 영천에 살았던 모금도 유씨는 유전의 후손들이다.


필자의 고향도 영천이라 어릴 때부터 유씨들의 후손이 일년에 한번씩 10월 묘사를 크게 지내는 것을 봤다. 유씨 선영은 현재 영천시 녹전동에 있다. 이런 유씨들의 업적은 일본에서 더 유명하며 활약한 업적은 농업이다. 임진 전쟁당시 일본은 하찮은 미개 국에 불과했다. 농업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임진 정유 전쟁이다.


임진전쟁을 일으킨 토요도미 히대요시는 전쟁 와중에도 조선의 기술자를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임진전쟁을 필자는“문화 전쟁“이라는 책으로 저술한 바가 있다. 일본이 우리의 도공을 많이 잡아갔다해서 “도자기 전쟁이다“라고도 한다. 


임진전쟁시 영천에 선조를 둔 이들 유씨들이 구국을위해 각처에서 활한 흔적이 많다. 유전 10대 후손인 유안 유필이 정유재란시 전라도 송촌이라는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중 오카아마(岡山) 성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가신인 나카시마손사에몬(中島孫左衛門)에 포로가 되어 나카시마 왜장이 살던 츠야마에 가서 신농법을 전수하고, 일본 대농업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전쟁시 선조들의 귀·코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모국을 그리기도 했다.



▲ 새로 발견된 쓰야마의 귀무덤과 안내판


◆쯔야마(津山) 市 귀무덤 새로 발견


임란 때 왜장들이 조선 장수의 전리품으로 베어간 코무덤을 발견하고 고국으로 모셔 올 때 이런 비극의 역사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이 불과 몇년 전인데, 오늘에 와서 또 다른 귀 무덤이 발견됐다. 이번 귀무덤은 코무덤이 있었던 오카야마(岡山) 현비젠(備前)시 가가토(香登)에서 얼마 멀지 않은 쯔야마(津山) 시 이치노미야(一宮)란 곳이다.


JR선 오카야마역에서 1시간 정도 가면 쯔야마역이 나온다. 쯔야마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동쪽으로 10분 정도가면 이치노미야라는 마을이 있다.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시골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일본인들은 이 곳을 본치(盆地)라고도 한다. 많은 나무들과 기름진 옥토로 여간 가물어도 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오카야마의 쌀도 주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바로 이 평화스럽기만 한 동네 한가운데 임진왜란 때 일본 병사들이 전리품으로 잘라온 귀무덤이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을 한가운데다. 귀무덤 주위에는 아직 주택이 들어서지 않은 논이 있고, 귀무덤 옆과 앞에는 도로가 나있다. 안내 간판이 없으면 누가 봐도 귀무덤임을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안내 간판에는 '이지장(耳地藏)'이라 씌어있다. 이곳에 귀를 감추어 놓았다는 의미이다. <위 사진>


"오오조야(大庄屋:성주)였던 나카지마 손사에몬(中島孫左衛門)은 조선출병 때 조선인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귀를 잘라 전공의 증거로 삼았다. 군령에 의했다고는 해도 정말로 슬픈 일이다. 당시 일본 병사들이 귀국후 여기에 무덤을 만들어 간판에는 '이지장(耳地藏)'이라 새겨 그들(조선병사)의 넋을 위로한다. 


포로로 간 영천사람인 유한·유필도 슬품을 이기지 못해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 이지장 간판을 쓴사람은 마쓰오카 미키히코 기(松岡三樹彦記)"라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조선인을 살육하고 귀를 베어와서 무덤을 만든 자는 나카지마 손사에몬이다. 


하지만 필자는 나카지마가 어떤 인물인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해봤지만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다만 귀무덤에 대해서는 이 마을 나카오 도모카즈(中尾友一)란 사람이 잘 알 것이라는 소개를 받고 찾아갔다. 

나카오 도모 카즈씨는 본필자와 면식이 있는자다. 그는 일본에서 철인 선수로 이름이 꽤 많이 알려져 있고 TV에도 자주 등장한다. 지금 작고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나 동남아시아 경기에 자주 참가하고 우승한 사실도 있다. 


당시 나카오 도모카즈씨는 본 필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귀무덤을 연구하려면 귀를 베기도 하고 무덤을 만든 나카지마 손사에몬을 알아야 한다"며 필자를 데리고 그가 살았던 저택으로 안내했다. 저택은 잘 보존되어오다가 일제시대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터는 유원지가 되었다. 유원지 간판이 있는 왼쪽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안내 간판이 또있다.


"이곳이 번정(藩政: 에도 막부)시대에 오오조야(大庄屋)로서 이지방을 다스렸던 나카지마 손사에몬의 대대로 내려온 저택터다. 나카지마는 전국시대 말기(임진왜란 직전)에 이곳에서 살았고, 이 지역 영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따라 조선전쟁에 출전했지만 그 후는 무기를 버리고 영농사업에 몰두했다. 모리(森)와 마쓰다이라(松平) 밑에서 오오조야가 되어 269년 간 그 직을 세습하며, 농촌발전과 복리증진의 결실을 거둬 향토 번영의 초석이 됐다. 담당지역은 히가시 이치노미야(東一宮), 니시이치노미야(西一宮), 오오다(大田), 가리보(粗保), 우에요코노(上野), 시타요코노(下野) 등 6촌이고, 이 곳이 지배의 본부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나카지마의 저택과 행적을 기록한 안내문

나카지마는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대에 가담해 임진왜란 때 참전한 왜장이란 것이 밝혀졌다. 당시 오카야마현 일대 남쪽을 비젠(備前)이라 불렀고, 북쪽은 미마사카(美作)라 했다. 그가 출전한 쯔야마는 옛 지명이 미마사카다. 나카지마는 임진왜란 때 경기도, 평안도, 경상도 등지에서 싸웠고, 정유재란때는 전라도에서 싸웠는데 귀국해서는 왜장의 신분, 칼과 모든 무기를 버리고 순수한 농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포로로 끌고 온 유안과 유필을 데리고농촌사회 문화를 일깨워 주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운 농업문화의 지도자는 일등 국민이고 그 지방을 다스리는 무사직 신분이였다. 여기에 영천인 유안과 유필이 활약했다.




◆나카지마에게 잡혀 온 유안 ? 유필 부자



쯔야마 향토자료관에는 『마쓰무라 야사부로(松村彌三郞) 고문서』가 있다. 이 고문서에는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진군에 가담한 나카지마는 귀국할 때 전라도 송현성(松縣城)에서 유안(劉安). 유필(劉泌) 부자를 포로로 체포해 나카지마의 저택에 살게 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지역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했다, 유안?유필의 후손은 전라도 송현에서 왔다는 의미로 성을 마쓰무라 즉 송촌(松村)라고 개명하고 유필의 아들인 마쓰무라 야사부로가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나카지마는 조선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발전된 조선 농업에 관심을 갖고 선조 유전의 후손 농업기술자인 유안과 유필을 체포해 농업기술을 보급시키고 자신도 무사의 길을 버리고 신농정책에 착수했던 것이다. 유안 유필은 부자간이다. 임진전쟁때 부자간에 전투에 참가한 의병들이 많았다.유안·유필도 부자간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안과 유필 부자는 조선식 신농법으로 일본 포로가되어 건너가 농업발전의 기초가된 인물로 나카시마 가문서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 유안과 유필이 끌려온 기록문서

「분로쿠 (임진년)원년 (1592) 우키타 히데이에를 따라 조선을 공격하라 명을 받아 다나베 구로타촌의 사람을 데리고 조선에 가서 각지를 다니면서 싸웠다. 그때 전라도 송현에서 체포된유안, 유필의 부자를 고국(일본)에 데리고 왔다. 그후 양국이 화목시 부친인 유안은 귀국하고 아들 유필은 유시마사의 가신이 되어 아내를 얻어 마쯔무라 쇼사부로란 이름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 유필의 묘지 간판


나카오씨는 본 필자를 유안과 유필의 묘터로 안내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400년 전 일본 쯔야마로 끌려간 유필의 묘는 도로 옆 잡초와 갈대 속에 놓여있다. 비석에는 유필의 묘'라는 글귀만 회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유안의 뼈가 담겼던 납골석이 있다. 근년에 와서 유필의 후손 마쓰무라 가문의 사람들이 나카지마의 묘지로 이장하고 묘비와 텅빈 묘터만 남았다.


유필의 묘에는 '당인묘(唐人墓)'라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유필의 마쓰무라 혈통을 이은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선조가 체포되어 끌려온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왔는데 안내판에는 체포되어 끌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여 수 차례 간판을 떼버린 탓에 최근에 이 안내판을 나카오씨 집으로 옯겨놓았다고 한다. '당인묘' 안내판 내용은 "이 묘의 주인은 본래 조선태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전쟁에 출정한 장군 나카지마 손사에몬에게 체포되었지만, 나카지마가 탁월한 인재로 여겨 전쟁이 끝날 때 포로로 데리고 와 부하로 삼고 '마쓰무라'라 하였는데, 농지개간, 치수공사 등 실적을 올렸다. 이 당인묘 외에 히가시이치노미야에 있는 당인전(唐人田)은 함께 기념해야 할 이름이다"라고 소개해 놓았다. 당인은 조선인을 칭하고 당전은 조선들녁이란 뜻이다 지금도 조선 이라칭하는 조선농장이 있다.


당시 유안과 유필의 농업기술 지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있다. 후손들이 '당인묘'의 안내판을 못마땅히 여기고 떼어버리려 한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체포되어 왔다 는 문구가 거슬리고, 후세에 좋은 말을 남기고 싶어하는 그들(일본인)의 심정이 깃들은 것이겠지만, 과거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도 중요하고 더군다나 우리 선조의 탁월했던 문화의 한 장면이 가려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나카오씨는 다시 유안과 유필이 개간해 수전(水田)으로 농사를 지었던 들녁, 즉 '당인전'으로 안내했다, 오늘날 이 들녁은 '당인전'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오카야마 쌀 생산량의 60% 이상이 이곳에서 나온다. 유안?유필의 농업 업적은 이 생산량이 증명하듯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유필의 비문


나카시마 고문서에는 유안과 유필의 업적을 오늘 날까지 빛내기 위해 기록한 문서에 유필의 무덤을 따서 유필 묘지 또는 당인전, 당인귀무덤 만들어 유필이라 하면 누구나 잘 아는 인물로  소개했다.


쯔야마의 귀무덤은 우키타 히데이에 가신인 나카지마손사에몬이 자른 귀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무덤을 만들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나카지마는 군지휘관의 명령으로 행했던 것이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했던 것 같다. 귀무덤 안내판을 쓴 마쓰오카 미키히코(松岡三樹彦)는 유필의 후손이자 향토사학자로써 이미 작고했으며, 더 많은 사료를 찾아야한다. 몇 사람의 귀가 이 곳에 묻혀 있는지 지금까지는 증빙사료가없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많은 귀가 묻혀 있다는 설과 귀는 이곳에 묻혀 있지 않고 나카지마 왜장이 슬픔을 애도하여 희생자의 영만 모신 것이라는 설이 있으니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과연 귀가 묻혔는가 하는 문제는 사료가 발견되어야 해결되겠지만 추측컨대 아마도 나카지마 왜장은 조선에서 포로로 데리고 온 유안-유필과 향토 발전에 힘을 쏟을 때 무엇보다 조선전쟁에서 귀를 잘라 온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해 이곳에 귀무덤을 만든 것이 틀림없다. 임진왜란 때 통치자의 명령이지만 귀와 코를 잘라 통치자에게 바치지 않고 슬픔을 애도했든 흔적으로 이해해야 옳다.


이 귀무덤 옆에는 나무로 만든 기둥이 있다. 기둥에 가벼운 해석(海石)돌을 달아 놓았다. 마치 사람의 머리를 상징하여 달아 놓은 듯한 모양새다. 교토 귀무덤을 100여 년 전에 연구한 호시노 히사시 (星野恒)는 임진. 정유란 때 이름있는 조선병사들 머리를 잘라와 교토 귀무덤과 같이 묻었다는 학설을 내세웠고, 정유재란 때 우키타 히데이에는 가신(부하)들을 시켜 김해 죽림성에서 김해 의병장 서의원(徐義元)의 머리를 비롯해서 수많은 의병장들의 머리를 베었다는기록이 있으니 우키타의 가신인 나카지마 왜장도 우리나라 의병장의 머리를 이곳 귀무덤에 같이 묻지 않았나 여겨진다. 


요즘도 쯔야마 귀무덤에 참배하러 오는 사람이 많다. 귀가 아픈 사람은 이곳에 와서 공을 들여 제사를 지내면 아픈 귀가 낫는다고 믿는다고 나카오씨가 전했다. 이 귀무덤의 비문은 원래 높이 150cm, 폭 60cm, 두께 30cm였다, 도로 옆이여서 대형 자동차가 자주 추돌해 비석의 절반정도가떨어져 나갔다. 비석 옆에는 돌로 미미보사쯔(耳菩薩) 즉 우리말로는 귀보살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잘린 귀가 몇 개인가는 상관없다. 이렇게 새로 발견 된 쯔야마의 귀무덤은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비젠시의 코무덤처럼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여 이같은 비참한 역사 현장을 훼손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 나카시마 家문서




0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yctoday.net/news/view.php?idx=771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회원로그인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청도읍성 예술제, 관람객 구름 인파 대 성황...미스터트롯2-박지현 가수 공연
  •  기사 이미지 경북 동부청사 환동해지역본부, 지역사회와 민·관 상생 협력 추진
  •  기사 이미지 (대회) 영천체육관 전국 종별태권도 선수권대회 7일간 열전 돌입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