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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는다④....임진년 정유전쟁과 조선 호랑이(虎), - 영천의 호당리(虎堂里)에 호랑이가 많았다?...“왜장 가토 창” 일본 문화재…
  • 기사등록 2021-02-07 15:54:08
  • 수정 2021-02-07 19: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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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는다>④

임진년 정유전쟁과 조선 호랑이(虎),

영천의 호당리(虎堂里)에 호랑이가 많았다?

조선의 범잡기운동에 혈안된 일본 왜장들

“왜장 가토 창” 일본 문화재 등록,

『주역(周易)』에 조선은 인방국(寅方國)


▲ 본지 칼럼_김문길 부산 외국어대 명예교수(철학박사/학술박사)


임진정유 전쟁은 문화전쟁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전쟁은 영토 빼앗기다. 그런데 임진전쟁에서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 문화재뿐 아니라 인권 및 생활환경까지 수탈했다. 이 중 범(虎)잡기운동이 벌어져 왜장들이 서로 다투면서 조선의 범(虎)에 혈안이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우리나라 많은 범들이 수난을 겪었다. 이같은 일본의 만행으로 세계 희귀 범의 씨를 말리는 단초가됐다. 범을 호랑이라 부른다. 호랑이(虎狼)는 범이 사납고 무섭다는 뜻에서 붙인말이다 호랑이의 “이”자는 호격 조사다. 그래서 범=호랑이라 칭한다. 그러나 범과 호랑이는 야생동물 포류과에 같은 종류지만 DNA는 다르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한다.


일본의 이같은 범잡기운동으로 당시 지명까지 생겨났다. 우리나라 지명가운데 범골, 범천동. 범일동. 범산.등 범(虎)의 호칭이 많다. 국토부 지리과 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이같은 지명이 수만개나 된다. 필자가 자라난 영천시 청통면 호당을 리로 바꾸어 호당리로 부르며 현재는 호당 1·2리가 있는데 필자는 호당(虎堂)2리에서 자랐다. 아마 범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범집이란 뜻에서 호당이라는 지명이 고문헌에 범집 마을로 되어있고 한자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부가 1930년에 한자가 없는 고유 명칭을 한자로 바굴 때 호당(虎堂)이라 했다. 총독부는 범호자를 쓰지말도록 지시도 했다. 이유는 조선산맥의 기(氣)를 꺽기위해서다. 일본은 당시 기가센 마을산맥에 쇠못을 박기도했다. 범호자를 바꿀때 부산의 범내골이라면 虎자를 凡자로 바꾸도록 지시하여 그때부터 범내골 범일동을 범(凡=대강 범)자로 바꿨다. 조선인의 기를 꺽는 의미로 쓴것이 지금도 전국에 이같이 존재하고 있다.


당시 조선 범은 중국에서도 유명했다.『주역(周易)』에 고조선을 들어 소개 하기를 인방국(寅方國)이라 했다. 인방국은 범나라 즉 범이 유명하다는 뜻에서 호칭한 것이다.


우리나라 70%가 산으로 둘려쌓여있다. 『삼국유사』에도 범이 서식하기 알맞다고 표현돼 있고, 신라 40대 헌강왕(憲康王)11년2월에 범이 궁궐안에 까지 들어와 득실거려 범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궁궐에 “범주의”라는 표석을 세우고 범에 물려가지 않도록 별도 무사를 배치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필자가 어릴때 울면 “범이 잡아갔다”하니 무서워서 벌벌 떤 적이 있다. 범이 많은때 사람이 행방불명이되면 범에 호식했다고도 했다.<그런데 범보다 더 무서운게 있다. 논 외로 당시 아이가 울면 범이 온다고 해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순사가 온다면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저유전쟁때 일본 순사의 악행이 컷음을 알수있다.>


일본에는 고대로부터 범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범이 많이 서식하는것을 부러워했다. 겐메는 천황(欽明天皇)545년11월에 백제 사신을 보낼 때 조선에 범고기 범가죽을 가지고 오도록 명령했다. 사신으로 간 센빠데이벤(膳巴 提便)은 백제중신들에 각별이 부탁하여 범고기 와 범가죽을 가지고와 한약으로 쓰고 가죽은 옷을 지어 입었다. 역대 천황들은 약효가 좋아 만병통치약으로 여길 정도였다. 686년 4월 덴무천황(天武天皇)은 일본에도 범을 번식시키기위에 조선에 범 한쌍을 기증받기도 했다. 기증받은 범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일본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 쌓여 습기가 많은 나라다. 범이 번식하기에 알맞는 풍토가 아니었다. 범은 대륙성기후에 번식이 왕성하다. 덴무천왕은 조선에서 기증받은 범이 죽자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하들이 하도 딱하고 참다 못해 포유류과 범을 닮은 고양이 한쌍을 임금님 옆에 키우도록 했다.


도토미 히데요시도 조선에 범대신 고양이를 키울 때 전쟁을 일으켜 왜장들에게 명령하기를 “조선에 범을 잡아 보내라고 명령한 문서를 필자가 발견했다. 도요토미의 이같은 명령문서는 수많은 왜장들에게 뿌려졌다. 영천성을 빼앗기위해 싸움을 벌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이같은 문서를 받고 청송과 신령에서 범을 잡도록 지시했다.



정유전쟁시 울주의 서생성과 울산의 울산성을 짓고 범을 잡아 모았다. 도요토미가 범고기를 잘받았다는 문서에는 "조선에서 보낸 범 고기와 범가죽 잘받았다. 고기는 약으로 쓰니 효혐이 대단하며 가죽도 잘사용하고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도요토미는 등골뼈에 고름이 생겨 어려움을 당할때 범고기를 먹고 나았다는 소식을 정유전쟁 중인 왜장들에 전하여 범을 산채로 포핵해 갔다는 범사냥 그림도 남아있다. 당시 영천과 의성, 청송, 울주군에서 범을 생포하는 장면의 화폭으로 지금 일본 교과서에 귀중한 자료로 실려있다.


'가토기요 마사'거 당시 범을 잡을 때 사용했던 창(槍)은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있다. 전시된 창은 날 한쪽이 부러져 있다. 당시 범을 잡을때 범 이빨에 부딪혀 부려진 것으로 표현돼있다. 가토 왜장의 고향은 구마모도(熊本)다.


구마모도의 시(市)를 상징하는 마크는 범을 잡는 창을 심볼로 디자인돼있다. 구마모도市에는 가토가 범을 사냥할 때 사용한 창이 한쪽날이 부러진 채 들고있는 동상을 만들어 놓은곳이 있다. 가토기요마사라 하면 경북과 경남에서 범을 잡았다는 유명인으로 알려져있다.


구마모도를 여행하면 지금도 “조선범잡는 가토장군 창”을 기념품으로 판매한다. 구마모도 시민들은 어린아이 첫 돌잔치 때도 가토처럼 힘센 장군이 되라고 범잡는 창을 만들어 주고있다. 구마모도의 명과 센빼(전병) 포장지에도 가토사진과 가토가 사용한 범잡는 창을 디자인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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