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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는다⑧...임진왜란 때 빼앗긴 백제7층 석탑
  • 기사등록 2021-04-04 20: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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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는다⑧


겐로쿠 공원 ‘해석탑’은 백제7층 석탑...임진왜란 때 빼앗긴 우리 문화재 


▲ 본지 칼럼_김문길 부산 외국어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철학박사/학술박사)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한 진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다. 그는 규슈(九州)지방에서도 대명(大名)으로 명성이 높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어려서 부터 고승의 지도를 받아 조선불교에 심취한 사실은 그의 회고담에 기록돼 있다. 누구보다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명을 받아 제2진으로 1592년 4월13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이 그의 첫 조선땅 일성이다.  


앞서 제1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왜병)가 동래성을 함락시킬 무렵이다. 부산에 도착한 제2진 가토의 군사는 육로로 경주·영천·신령·의성과 문경새재·박달재를 넘어 수도 한양까지 진격했다.  불과 26일 만에 가토에 의해 경복궁이 함락되자 선조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유성룡을 이같은 피난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징비록'에 기록했다.


이 때 가토 기요마사 군사들이 궁내 귀중품들을 샅샅이 뒤져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경복궁내 법당 앞에 세워져 있던 백제7층 석탑까지 가토가 가져간 것이다.

 

높이 5m에 무게가 몇 톤이나 나가는 거대 석탑을 당시 군수물품을 취급하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일본으로 싣고갔다. 마에다 역시 독실한 불자다. 마에다는 이 석탑이 탐나서 가토로부터 선물로 받아 자신이 살던 가나자와(金澤)성에 세웠다. 가나자와 성은 그후 겐로쿠(兼六)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지금 일본국립공원으로 바뀌었다.  일본 3대 공원중 하나로 손꼽힌다. 현재 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은 백제 7층석탑(해석탑=海石塔)과 함께 노수명목을 보기위한 견학장소로 손꼽힌다. 결국 마에다에게 바쳐진 백제7층 석탑은 오늘 날 해석탑(海石塔)으로 보존되고 있다.  다만 당시 가지고 갈 때는 7층 석탑이었는데 겐로쿠 공원에 세울 때 1,2층은 없어지고 지금은 5층으로 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 지금의 일본 국립공원 겐로쿠 공원에 보존된 백제7층석탑과 본지 김문길 박사(오른쪽)


가나자와(金沢)市 향토사학자는 해석탑의 보존 경과에 대해 “메이지(明治)신정부가 들어서기 전 가나자와 성주인 마에다(前田)가 조선의 유일한 백제석탑을 입수해 성내에 세워놓고, 백제7층 석탑이란 안내판에 구체적으로 적었다"고 전해지는데 "메이지 유신 후 행정 개편 때 바다 건너서 왔다는 의미로 해석탑이라 고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국교가 정상화 될때를 대비해 반환 소송이 일어 날것을 우려해 계획적으로 바꾼것이라 할수있다. 이렇게 임진왜란 때 빼앗긴 우리 국보급문화재는 이름 마져 바꾼것이 수만종류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의 궁금증은 왜장 가토가 왜 그 무거운 석탑을 가져갔으며, 마에다는 왜 자기가 살던 가나자와 성에 세운 것인가에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뛰어난 문화를 자랑했다. 백제 초기에는 석가모니 사리를 모시기 위해 각 사찰에  목탑을 세웠다. 백제중엽에 와서는 목탑을 본뜬 석탑을 제작하기 시작하게된다.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는 석탑이 크게 유행했고, 불상과 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지각색 모형으로 석탑 제작이 대유행 시기를 거첬으며, 당시 사찰은 물론 작은 암자에까지 석탑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일본의 유명한 절에서조차 석탑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석탑보다는 목탑이 많았기 때문이다. 왜 일본사찰에는 목탑만 안치되어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일본에는 석탑 기술이 없어 제작이 어려웠다. 목탑기술도 백제 석공인 사공(寺工)과 와박사(瓦博士)등이 건너가 전수한 것으로 지금까지 대부분 목탑 문화에머물렀다. 석탑 제작 기법을 몰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고대 국가에는 석공이 없었던것도 한 이유다.


백제7층 석탑은 정교하고  예술성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분류된다. 석탑은 3,5,7,9,13층 등 홀수로 가 대부분으로 매우 정교하다. 백제7층 석탑은 우리나라에도 두서너개 밖에 없다. 일본 가나자와 겐로쿠 공원의 백제7층석탑은 국보급 중 최고급에 속한다. 


가토가 생명을 걸고 전쟁 중에 이 석탑에 욕심을 부리며 임진왜란을 총지휘한 참모 마에다에게 선물로 상납한 것이다. 해석탑을 연구한 향토사학자들은 "조선인이 국태민안과 개인의 소원을 빌기 위해 사찰에 가서 탑돌이를 하고 기도했던 것처럼 마에다고 백제7층 석탑을 성내 그것도 거실 앞에 세워놓고 아침저녁으로 온 가족이 탑돌이를 하면서 국태민안과 마에다의 가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전한다. 


※. 국내 현존 유명 석탑 : ▲당진 영탑사(靈搭寺) 유리광전 뒤 보조국사 지눌(고려중기) 7층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216호), ▲신라 애장왕(고려시대 석탑양식) 때 건립된 동방사지 7층 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60호), ▲상주 상오리 7층석탑(보물 제683호) 통일신라시대 양식, 고려 전기 작품,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7층석탑(국보 206호), 통일신라시대 등---<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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