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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일본속에서 조선 역사를 찿는다⑨...임진왜란 때 빼앗긴 신라 범종, 일본 국보 지정
  • 기사등록 2021-04-23 22:34:46
  • 수정 2021-04-24 15: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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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에서 조선 역사를 찿는다⑨


임진왜란 때 빼앗긴 신라 범종, 일본 국보로 지정

신라시대 범종 모두 7개 중 일본에만 5개

문화재 반환운동, 정부차원 체계적 대안 필요

경주 애밀레종=신라시대 범종 중 국내 유일


▲ 본지 칼럼_김문길 부산 외국어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소장(철학박사/학술박사)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남달리 사찰의 종(鐘)을 좋아했다. 그의 시(詩) 가운데 범종(梵鐘)과 관련한 ‘마음을 맑게 하여 풍속을 깨우치고 음향을 조화시키며 원기를 통달케 하노라’는 시가 있다. 신라시대 우리 조상들은 신비의 주조술로 은은한 소리의 여운과 아름다운 조각미를 풍기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鐘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범종은 佛家에서 일종의 악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예불에 사용하는 사물(四物) 범종, 운판, 법고, 목어 중 범종의 소리가 으뜸이다. 인간을 백팔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소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안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 오타니 요시카타(大谷吉 隆)는 통일신라 때 제작된 범종을 훔쳐가 자택인 와카사(若) 성 내 상궁신사(常宮神社)에 두었다. 앞서 필자가 신라범종 연구차 방문했을 때 그는 우리의 신라 범종을 국보수장고(國寶收藏庫)를 만들어 보관했다. 간누시(신주(神主)에 의하면 "일본 국보인 신라범종의 훼손을 막기위해 수장고를 만들었고, 누구나 관람할 수 있던것을 지금은 1년에 한 번 씩만 개관한다"고 했다.


일본 『상궁신사소지常宮神社小誌』에는 신라범종의 유래를 “게이초(慶長)2년(1597년) 2월 29일 와카사 성주 오타니 요시타카가 조선 전쟁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진주에서 범종 1구를 가져와서 봉납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높이 115.5cm, 구경(口徑)66.7cm 동종(銅鐘)이다. 제작 연대는 태화(太和)7년 신라 흥덕왕 7년(833년)이다. 이 범종의 명문(銘文)중에는 “삼충사지 행도사지 성사 (三忠舍知 行道舍知 成士)”라는 글이 있으니 삼충사지와 행도사지는 신라 관위명이고, 제작자는 성박사, 즉 성씨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안내문에는 “원래 신라범종은 조선 청주(靑州)연지사(蓮池寺)에 있던 것을 입수했다” 라고 기록돼 있다. 오다니요시다카의 조선범종의 소유寺(주인)와 범종 을 보관한 보물관 입구의 소유사가 서로 다르게 기록돼있다. 의도적으로 종의 주인을 흐리게 하거나 한자 진주(晉州)를 청주(靑州)로 오역했을 수 있다.


▲ 신라 범종(왼쭉)이 소장돼 있는 일본 상궁신사...오른쪽 옆에 본지 김문길 박사


그러나 상궁신사의 역사지인 『상궁신사소지』에는 신라 범종의 소유사는 조선 진주 연지사로 되어 있다. 필자가 진주 연지사라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어렵게 진주 시민운동하신 분들의 도움으로 연지사를 찾았다. 범종은 용통(甬筒)이 3단으로 제작돼 용뉴는 수직방향으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종정(鐘頂)에 새겼다. 종신 하단에는 비천상(飛天像)이 피리를 불면서 평화스럽게 승천하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또 종신 하단에는 같은 크기의 방곽(方廓)을 구획하여 그 내부에 파도무늬를 조밀하게 새겨 두른 해파문(海波文)을 추가로 장식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호국불교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때문에 왜장 오타니 요시타카는 임진왜란시 일본군대가 승전 기념과 일본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미로 신라범종을 수탈해 간 것으로 파악된다. 범종을 가져간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와 강화조약이 시도될 무렵이다. 강화조약 불발로 일본은 군사를 증원시켜 재 침략하였는데 이때 오타니 요시타카는 와카사 성내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출전식을 올리면서 신라범종을 타종하며 승전가를 외쳤다.


신라범종은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서 1900년 국보1등급으로 지정되었고, 천황은 태자가 병에 걸렸을 때 이 신라범종을 참배함으로써 병이 나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 정국이 안정된 1952년 10월 또다시 일본문화재 조사국에서 신라범종을 신 국보특급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른다.


상궁신사의 신라범종은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유명한 정치인이나 문예가들이 즐겨 관람했다. 그중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자주 이 신사를 찾았는데 그의 유명한 단가(短歌)에는 “중추 대 보름날 밤 쓰루가에 묶으니 뜻밖에 비가 내려 가을 달은 간 곳 없고 종소리만 은은히 파도와 같이 들리네”라고 신라범종을 노래했다. 지금도 상궁신사에는 일년에 한 번씩 개방하는 신라범종을 보기 위해 오늘도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우리나라 선조들이 제작한 범종은 인간의 번뇌를 씻어주는 마음의 고향이며 원천이자 조상의 슬기로운 주조기술과 얼이 담긴 것. 이런 신라범종이 이국땅에 그것도 임진왜란 때 일본 왜장들이 빼앗아간 일본 국보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슬픔이 더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범종은 모두 7개 뿐이다. 그 중 5개가 모두 일본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경주 애밀레종으로 알려졌으나, 나머지 한개는 강원도 '상원사'(上院寺)에 보관 중 "일본이 전쟁 때 녹여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데 사용했다"는 당시(지금부터 15년 전 쯤) '상원사'의 전언이 있었다. 하지만 확인 결과 현재 상원사에는 신라(新羅) 33대 성덕왕(聖德王) 24(725)년에 만든 동종이 국보36호로 지정돼 현존 하는것으로 확인된다. 종신 하단에 비천상(飛天像)이 피리를 불면서 평화스럽게 승천하는 모습이 조각된것은 애밀레종과 유사하다. <아래 사진=출처 인터넷 백과, 2021.4.24 상원사 관계자 전화 확인 필>


▲ 신라(新羅) 33대 성덕왕(聖德王) 24(725)년에 만든 국보(國寶) 36호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범종=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안동 누문(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조선(朝鮮) 8대 예종(睿宗) 1(1469)년에 왕명(王命)으로 상원사(上院寺) 옮김


이 때문에 필자는“왜군에 빼앗긴 연지사 종 찾자(신라범종=일본 상궁사 소장) ”(조선일보 2009.1.19) 라는 국민행동 창립 총회를 갖고 우리문화재 반환운동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성급하게도 이보다 앞서 진주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이 절차를 무시하고 개별적으로 후쿠이현에있는 상궁사를 찾아가 범종 반환을 건의하자 상궁사는 문을 닫아버리고 1년에 한 번씩만 범종을 개관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일본은 수많은 조선 문화재를 더욱 단속하고 나섰다. 좀 더 체계적이고 정부적 차원에서 신중하게 대응 할 필요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신라 범종과 동 시대에 만들어진 경주 에밀레종과 강원도 상원사 범종만이 유일하게 우리민족의 애뜻한 혼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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