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순교 교수] 영천의 역사 인물 탐색(上). 정세아[1535~1612]①
  • 기사등록 2021-05-20 23:20:15
  • 수정 2021-05-20 23:21:45
기사수정


▲ 박순교 교수(경북대 인문학술연구원 객원 연구원, 학술연구 교수)


영천의 역사 인물 탐색(上). 정세아[1535~1612]①


영천은 일편단충一片丹忠의 절의와 불세출의 기예로 이름 있던 곳이었다. 고려조와의 의리를 지키다 죽은 정몽주가 그러했고, 화포를 처음 만든 최무선이 그러했다. 영천은 격동의 세월 속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두 달여 군영을 꾸린 곳이며, 임진년에 난리가 터지매 사방의 무리가 모여 창칼을 들고 왜적과 싸운 불굴의 기상이 서린 곳이기도 했다. 지금 작은 땅 덩어리에서 그저 한 치 작은 이익을 다투며 골몰하는 우리에게는, 거미줄처럼 얽힌 역사의 낟알들이 범접하기 어렵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나간 기록의 갈피를 한량없이 더듬으며 역사의 추적자가 되어, 가없는 울림을 던진 한 인간의 오롯한 면모를 탐색하여 동시대인을 격동시키려는 이유가 이에 있다. <필자 주>


◆사통팔달의 추요지


영천은 동쪽으로 경주부 안강현 경계까지 42리요, 남쪽으로는 같은 부府 자인현慈仁縣 경계까지 33리요, 서쪽으로는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3리요, 북쪽으로는 임내任內 신녕현新寧縣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였다. 고려 초년에 도동道同?임천臨川 두 고을을 합쳤으니, 두 물줄기를 합쳤다 하여 영주永州라고 했고, 달리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했다. 조선조 태종太宗 13년, 이름을 고쳐 현재의 영천군으로 하였다.

영천은 포항, 대구, 안동이 모두 80리길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그 화살대가 한 곳에 모이는 중핵에 영천이 자리했다. 이른바 경상 좌도의 추요지樞要地였다. 까닭에 남쪽 적의 발길이 여러 번에 걸쳤었다. 최무선과 임진년의 무리가 공히 왜적을 겨냥했던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임진년의 거의擧義


1592년 임진년의 전쟁. 당시 정세아의 나이는 쉰여덟이었다.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듯, 정세아는 거의擧義의 선봉에 섰다. 그에 대한 세평은 이러했다.


鳥獸와 山林은 公을 일러 멀리 숨었다 할 것이고

兵馬와 兵器는 공을 일러 잘 싸웠다 하리라.

자벌레처럼 굽히기도 하고 매와 같이 날기도 했으니,

그의 시대가 그렇게 하게 했다.

공이 대관절 무엇을 구했겠는가. 그 오롯이 義를 행했다.

구름처럼 산 위에서 나와 삼농三農을 윤택하게 하고

폈다가 거두어서 태공[太空, 까맣게 높고 먼 하늘]으로 돌아갔다.

(趙顯命, 神道碑銘)


정세아가 창과 칼을 들어 거의했건만, 조수鳥獸와 산림山林조차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직 전장의 창과 칼, 병마만이 정세아의 활약을 짐작했다. 시대의 불행하고 처참한 자화상을 드러낸 대목이자 정직한 위정자의 자기토로였다. 정세아의 진정한 활약이, 조선의 언로를 움직이고 조선의 벼슬을 쥐고 흔들며 세간의 여론을 움직이던 이들이 아닌, 유혈 낭자한 전장을 누비던 창과 칼, 병마만이 징험했다. 이것은 정세아가 공을 다투어 양지에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숨어서 활약한 은미한 주인공임을 알게 한다.


그 자신, 저열한 난신적자의 틈 속에서 공과 벼슬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의를 구하였고 백성의 삶을 구하였으며, 가진 모든 것을 풀어 헤쳐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윤택하게 한 다음, 다시 태허太虛로 허허롭게 돌아갔으니, 이의 갸륵한 천명이야말로 정세아가 걸어간 길이 여느 의병장 혹은 관리들과 출발과 끝이 확연히 달랐음을 징험하는 것이었다. 정세아의 삶은 어둠 속에 피어나 조선의 생령을 건지고 삶의 온기를 전했으되, 종국에는 모든 시운時運의 틈에서 공명의 끈을 내려놓고 고요히 사라졌다. 필자가 역사의 행간에서 지워진 그의 삶을 하나하나 부조해 내려는 까닭이 이에 있다.



정세아의 출생과 성장


1535년(중종 30년) 영천永川의 자양紫陽 노항촌魯巷村. 한 사내가 출산의 소식을 기다리며 뜰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천의 동북東北에 있어 항간에서는 일대를 뭉뚱그려 자줏빛 태양이 머무는 곳[자양紫陽]이라 일컬었다. 한참의 시간이 혼곤하게 흘렀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윤량은 자신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고아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세아世雅라는 이름을 지었다. 아雅는 큰부리까마귀를 의미하기도 하고, 바르고 우아함을 의미하기도 한 터라, 아이의 바르고 우아한 삶을 희구함과 더불어, 오천烏川, 까마귀[오烏] 내[천川]를 발상지로 내세우는 집안의 유래와도 일맥상통했다.


정윤량의 집안은 문필을 중시했다. 집안의 세대와 세대에 걸쳐 붓과 붓에 오롯한 지조와 신념이 괴어 전해졌다. 정윤량은 아들 정세아의 자字를 화숙和叔이라 명명했다. 화숙은 아득한 옛날 요堯 임금의 명신名臣이었다. 중국의 요 임금이 거느린 어진 네 신하 중의 한 사람이 화숙이었다. 정윤량이 새삼 정세아에 거는 기대와 관심이 대략 이와 같았다.


부친 정윤량은 퇴계의 직전제자였다.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가학家學을 이었으니, 정세아는 퇴계학맥에 간접적으로 연결된 셈이었다. 정세아는 스물셋의 나이인 1557년(명종 12년) 비안比安 현감縣監 일직一直 손치운孫致雲의 딸과 혼인했다. 이듬해 스물넷의 나이로 1558년 진사시 3등 37위로 입격했다. 젊은 그가 쓴 진사시 회시 답안에서는 민초의 거친 삶과 애환을 피를 토하는 심정의 직간으로 절절이 풀어내고 있다. 서른한 살이 되던 1565년(명종 을축), 보우의 처단을 상소하며 일시 상경하기도 했다.



나눔과 베풂


정세아의 이후 행적은 미궁에 쌓여 있다. 다만 그간의 세월을 정세아가 어찌 보냈을 지를 함축적으로 보이는 기록이 없지 않다.


공이 고을에 계실 때는 경박한 자가 부끄러워할 줄 알고, 게으른 자는 그 잘못

을 깨닫는 마음을 낼 줄 알았다. 선을 행하는 자는 믿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악을 짓는 자는 꺼리는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무거운 바를 알 수가 있겠다. (장현광이 쓴 제문祭文)

남의 궁핍한 것을 보고 베풀어주기를 미치지 못할까 염려했다. 이러한 그의 효제孝悌와 적선積善이 뒷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거의擧義하매, 수백 명이 호응한 뒷배경이 되었다. 요즈음 가장 핫(Hot)한 ‘선한 영향력’의 뚜렷한 사례임을 징험하는 셈이다.



변란의 조짐


이즈음 세상의 일들은 더욱 엄혹해졌다. 재변과 변란의 조짐이 횡행했다. 쉰여섯이 되던 1590년, 정세아는 친한 벗들과 일대를 잠행했다. 남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불국사 영지루影池樓와,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전설을 담은 주사산朱砂山과,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치술의 비련이 깃든 곳, 치술령에 오르기도 했다. 슬픔을 머금고 무력함을 담아 시세를 탄식하는 일행에게, 냉철하게 사세의 근본을 설파하기도 했다.


이즈음 조선 조정은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을 떠난 지 8개월 만에 통신사 일행은 토요토미와 대면했다.


한낮임에도 사방은 깊고 어둡고 고요했다. 밀촉을 켜놓지 않으면 외부의 침입자가 방안을 금세 파악할 수 없도록 자욱한 음영이 드리웠다. 간혹 등잔의 벌불이 조용히 출렁였다. 그럴 때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했다. 조용히 고개를 들자, 주변이 밝아지고 어두워질 때마다 토요토미의 용모는 조금씩 달라 보였다.

쉰다섯 살의 토요토미는 검은 얼굴이었다. 3층 높이의 큰 병풍을 뒤로 한 채, 검은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은 채 삼중으로 된 보료 위에 남쪽을 향해 앉은 채로 조선의 사신을 맞았다. 세 겹 보료의 높이가 한 자를 넘었다. 용모는 원숭이같이 생겼으며 수염이 거의 없고 언뜻 키도 작아 볼품이 없었다.


다시 보니 대체로 매섭고 야위고 굳세며, 풍만함이 부족했다. 머리를 틀어 뭉쳤으며, 한쪽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으나, 큰 흐트러짐이 없었다. 앉은 모양이 빼어났다. 볼수록 눈빛이 매우 예리하여 사람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의 왼편에는 철포鐵砲와 도刀가 있었다.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다. 머리 위에는 창 따위가 걸려 있었다. 서쪽에는 그의 측근 셋, 공가公家 다섯. 총 여덟이 열을 이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꿇어앉아 있었다. 흑색 통소매와, 그 위에 걸쳐진 그들의 붉은 겉옷에는 은으로 만든 표가 각기 달려 있어 높고 낮음을 드러냈다.


넓은 방 중앙에는 사각형 모양의 탁자 하나만 휑하니 놓여 있었다. 조금 뒤 동쪽에 앉은 각각의 조선 사신 앞에도 작은 호족반의 상 하나씩 놓였다. 차려진 음식이라고 해 봐야, 각각 떡 한 접시와 탁주 한 동이씩이었다.



너희들 모두 술을 들어라.


토요토미가 잠시 조선 사행의 면면을 훑었다. 그러더니 남면南面한 자세로 짧게 말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질그릇 사발에 담긴 술 한 잔씩을 말없이 들이켰다.


주도酒道는 지극히 간략하였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접견의 의식은 끝이 났다. 절이나 읍을 하거나 술을 권하고 받는 예법을 일절 행하지 않았다. 황윤길이 조선 사절을 대표하여 토요토미에게 조선왕의 옥새가 찍힌 국서와, 몇 필의 비단과 인삼, 호피, 모시, 삼베, 붓, 먹, 은장도, 청심원 등을 헌정했다. 엎드려 있던 시신 侍臣 두엇이 그것들을 받아들고 토요토미의 탑전에 전했다. 그리고는 짧은 몇 번의 문답이 더 오갔다. 융숭하고 장중한 특대特待는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토요토미는 일어나 방 뒤쪽에서 자신의 갓난아이를 안고 나왔다. 갓 잠에서 깬 갓난아이를 안고 어르며 토요토미는 방이랑 마루를 천천히 돌아 다녔다. 그의 맨발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잠시 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장침에 기대앉은 그는 조선 악사들의 음악을 청하여 들었다. 가야금, 비파, 옥피리, 장구, 피리. 다섯 악기가 율려律呂와 궁상 宮商을 맞추었다. 어린 아이가 갑자기 칭얼댔다. 토요토미는 아이가 오줌을 쌌다고 말하면서, 음악을 멈추게 했다. 병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토요토미는 엷게 웃으며 시종을 불렀다.


쉰셋의 나이에 어렵게 얻은 외아들. 아비의 정이 곡진하게 비쳤다. 그의 낮고 허허로운 웃음이 일순 허공을 울렸다. 웃음은 비수처럼 사방을 채웠다. 어둠 속에서 대기 중이던 몇몇 여인 중 하나가 나직한 대답과 함께 머리를 수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치맛단이 바닥에 끌리며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이내 그녀는 머리를 수그린 채 그 아이를 받아들고 옷을 갈아 입혔다. 일본의 시신侍臣들은 다들 침묵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숨죽이고만 있었다. 그 행위의 처음과 끝에 조선의 사신들은 안중에 없었다. 토요토미는 다시 조선 사행을 쳐다보지 않았다.



불행의 근원


1591년 음력 1월 28일, 경인년에 일본으로 나아간 통신사 일행 200여 명이 부산에 도착했다. 떠난 지 대략 11개월 만이었다. 대마도 도주 종의지宗義智가 귀로에 다시 동행했다. 황윤길은 즉시 파발을 띄워 일본의 침입이 임박한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사행은 한양을 향해 각자 다른 3로路로 나아왔다. 부산에 도착한 지 32일이 지난 1591년 음력 3월 1일. 선조가 친림한 인정전의 조당에서 사행을 둘러싼 복명이 있었다. 황윤길, 김성일, 허성 세 사람의 말은 조금씩 다 달랐다. 통신사의 명을 받아 다시 복명復命하기까지 1년이 걸렸고, 일본에서만 9개월을 소요한 사행이었건만, 토요토미의 초상에서 일본의 침입까지 시종일관 엇갈린 정보에 선조도, 조선 조정도 혼란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서글픈 현실이 봄바람을 타고 조선 조정의 곁에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하등 이상할 바 없는 어수선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수평선 너머 도도한 일본의 굳센 욕망이, 2백여 명을 동원한 1년의 세월로도 통찰되지 못했다. 통한의 시간이 담긴 일이었다.【다음호 계속】



0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yctoday.net/news/view.php?idx=836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회원로그인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대회) 영천체육관 전국 종별태권도 선수권대회 7일간 열전 돌입
  •  기사 이미지 육군 50보병사단, 올해 첫 예비군훈련 시작... ‘최정예 예비군’ 육성 박차
  •  기사 이미지 국립영천호국원, 설 명절 무연고 국가유공자 합동 차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