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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김유미가 바라보는 소설같은 대한민국(50)-6.25특집▶6.25를 모르는 국민은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
  • 기사등록 2021-06-23 21:26:09
  • 수정 2021-06-23 22: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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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필진] 김유미 작가▶‘화려한 이별’, ‘불타는 태양’, ‘순수문학 사화집’, ‘텃밭문학 사화집’외 다수. 1960년생,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경영학 전공. 미국 시카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본지 특별기고 필진‘화려한 이별’ 장편소설 김유미 작가가 23일 자신의 연재 글 '소설 같은 대한민국'(50호)를 썼다. 글에서 김 작가는 올해로 6.25전쟁 발발 71년을 맞아 전쟁 경험 세대와 1966년 이후 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구분했다. 그는 신세대를 향해 "6.25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작금의 사회주의화 되어가고있는 국가 현상을 알리고 "과연 공산국가 체제를 원하는 것인가?"라며 질문을 던졌다. 김 작가는 최근 젊은 세대들에게 "사회주의를 원하면 더불어민주당으로"라며 역설하고 6.25의 실상을 자세히 해부했다.



김유미 작가가 정리한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의 전쟁이다. 유엔군과 의료진을 비롯하여 중공과 소련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었다. 북한은 남침전쟁을 남조선해방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휴전일 뿐 한반도는 전 셰계에 남은 유일한 냉전지역이다. 언제나 전쟁이 다시 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6.25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국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었다.


1950년 3월~4월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가해 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은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불법 기습 남침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전쟁은 1주일만에 북한군의 승리로 끝날 뻔 했으나, 유엔은 미합중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유엔은 일본 도쿄에 본부를 세웠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연합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1950년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북진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김일성은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군사지원을 간청한다. 1950년 11월 중순 중국인민해방군(중공군 또는 중국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역전되었고, 혜산진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후퇴하기 시작해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가 1951년 3월 15일 재탈환하였다. 그 와중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 함흥 학살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가 지속되면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경제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심지어 38선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전쟁까지 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으며, 고지전 이후 1953년 7월 27일 22시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설정되고 휴전에 들어갔다.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21 사태, 연평도 포격전 등 남북 간의 충돌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1950년 6월 당시 북한군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 1사단(청단∼적성), 7사단(적성∼적목리), 6사단(적목리∼진흑동), 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민족보위성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1948년),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6월 12일부터 북한군의 38선 배치를 위한 부대 이동은 시작되었으나 38선에서 떨어져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남하했다. 23일에 완료된 북한군의 38선 배치 병력을 보면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및 3개 경비여단 등으로서 북한 공산군의 총병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북한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 1사단, 4사단, 3사단, 105전차여단이, 2군단에서 2사단, 12사단, 5사단이 배속되었다.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북한군과 별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무성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Yak-9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전차가 단 한대도 없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연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성능이 향상된 후기형T-34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무기였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경곡사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별로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개성-문산-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의 거짓말-자신들이 남하한게아니라 "대한민국이 북한을 공격해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으로 소련에 지원요청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 하에,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소련에서 지원한 최신형 T-34/85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장비도 부족했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미국 공군 항공기가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항공기 투하용 ‘AN-M64’ 미제 폭탄”을 한강 대교와 한강 철교에 투하했다.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 그 파문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 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안보이사회에 긴급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이어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국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의 한 · 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세 방면(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및 포항)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북한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연안으로 침입하는 한편 경북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세 방면으로부터 부산-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은 8월 15일 대구를 침공하고자 대구 서남북방에 6만의 병력과 수십대의 전차를 집중하였으나 16일 미국 공군 B29의 전략적 대폭격으로 완전 궤멸되었고, 이 사이 연합군 병력은 한국군 5개 사단을 비롯하여 미군 4개사단, 영국군 2개 대대, 호주군 1개 대대 그 밖에 10개국에서 파견된 수만의 연합군으로 증원됏다. 북한군의 주력을 유도흡수한 연합군은 마침내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고 비로소 90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 시민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10월 19일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고,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인민 지원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여(11월 28일)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연합군은 장진호 지구의 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철수 작전을 시작하여 서울 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 함흥 학살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한반도 내에서 미국, 소련, 중국까지 개입하여 한반도에서 모두 맞붙었다.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6.25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본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고려 궁궐 만월대는 미군의 야전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불도저로 파헤쳐 지기도 하였다.


6.25전쟁으로 인해 1,000만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많은 고아들 중 상당수의 어린이들을 미군 장병들이 입양해서 키웠고, 이들은 어른이 되자 한국계 미국인이 되었다. 6.25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으로는 전후 공산세력에 의한 남침을 막고 경제적으로는 성장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나,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반공주의가 국가의 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남북을 분단시키는 경계선이 전후 다시 바뀌게 되었는데 개성시 등에 평야 지역은 북한으로 되고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조금 더 늘어난 산악 지역은 남한으로 정해졌다. 군사적으로는 산악 지역이 평야 지역보다 점령하기가 힘들어서 더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군사 분야에서는 전후의 점령 지역에 전쟁 이전의 점령 지역보다 더 의미를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공산왕조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계획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북한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 개성과 황해남도 일부 지역을 전후 신해방지구라고 하며 거기 살던 주민들을 함경도로 가서 살도록 보냈고, 함경도에 주민들을 신해방지구로 보냈다. 그리고 개성 쪽으로 탈북이 힘들도록 개성에는 승인 번호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진영을 지키고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군에 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생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시켰다. 그리고 국제법상, 대한민국을 침략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외면과 지탄을 받았고, 이는 한동안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소련과 관계가 밀접해지는 경향을 낳았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중국의 경제는 피폐해져서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의 사업화는 1980년 모택동의 개방정책으로 발전했으나 그 이전에는 피폐했다.


UN소속 6.25 참전국가는 전투부대 16개국, 의로지원 6개국에 달한다. 미국, 영국, 호주, 네델란드, 뉴질랜드,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필리핀, 터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디오피아, 프랑스 등이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등이 의로진을 파병했다. 그중 미국을 제외한 UN군 사망자가 4만 여명에 달하고 미군 사망자를 합치면 10만 여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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