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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의병장 호수정세아선생 생애와 사상' 학술발표회...15일 영천시민회관
  • 기사등록 2022-04-15 21: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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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박한우 기자]


15일 영천시민회관에서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역사인물학술발표회가 '호수정세아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개최됐다.


이 학술발표회는 경상북도 도비예산지원을 받아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에서 주최하고, 신태수 영남대학교 교수등 4명의 사학자들의 발표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제1주제는 영남대학교 신태식교수의 '호수 도학의 지향가치와 그 현대적 의의' ▶제2주제는 우인수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의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임란창의와 구국활동' ▶제3주제는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김원준교수의 '호수 정세아 시의 특징' ▶제4주제는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정병호교수의 '백암 정의번(정세아의 장남)의 생애와 풍모'라는 내용으로 학술발표를 이어 갔다.


호수 정세아(1535~1612)는 임란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진년에 전란이 발발하자 영천에서 제일먼저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맞섰으므로 의병장임에는 틀림없다. 호수는 1592년 5월초에 창의했으며 신녕의 백운재, 권응수장군도 5월초에 창의했다.


1592년 4월 20일경에 전국최초로 기병했다고 알려진 곽재우(1562-1617)보다는 늦지만, 호수정세아의 창의일이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빠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수백명에 달하는 의병을 효율적으로 이끌며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렸으며 대표적인 영천성탈환 전투다.


당시 일본군들에게 점령당한 하나의 성을 온전하게 탈환한 것은 영천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영천성탈환의 기세를 몰아 경주성탈환에 나섰으나 일본 기습군에 의해 외곽을 포위당하자 정세아의 아들 정의번은 아버지를 구하려고 세번이나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맞아들의 귀한 목숨을 나라에 바친 정세아는 일단 퇴각한 후 향리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이러한 희생이 바탕이 되어 경주성마저 수복하여 경상도의 동북부지역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반격을 위한 튼실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정세아 부자가 실천한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환구서원을 세워 후손에게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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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2 육군원사 전역
    ○ 2012 보국훈장 광복장 수훈
    ○ 2014 무공수훈자회 영천시지회 사무국장
    ○ 2016 6.25참전유공자회 영천시지회 사무국장
    ○ 2018 (사)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재무이사
    ○ 2021 도서출판 도계문화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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