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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박어둔'을 주목하라!...'안용복' 보다 더 독도 지킨 박어둔
  • 기사등록 2022-08-19 22:19:31
  • 수정 2022-08-21 11: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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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이번에는 '박어둔'이다."

'박어둔'을 주목하라!...'안용복' 보다 더 독도 지킨 박어둔


▲ 김문길 박사,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김문길 박사]는 경북 영천 호당 출신으로 전국에서 처음 '마상재(馬上才)'를 영천에서 발굴 재현 한 올해 77세 올드 학술인이다. 2013년 5월 당시 한혜련 도의원을 통해 조선통신사의 핵심 주제인 ‘마상재’(기마문화) 복원을 위한 道의회 5분 발언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이로 인해 같은 해 영천상공회의소에서 ‘영천대마문화 창조를 위한 한·일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됐다. 국내 몇 안되는 일본문화(사) 전문가인 김 박사는 2020년부터 본지 논설위원으로 '일본 속에서 조선역사를 찾는다'를 연재해 왔다. 그동안 본지를 통해서도 일본 속 한글 신대문자, 영천성 수복, 대마도는 조선 부속 섬, 논개 무덤의 진실, 일본 최초의 조선 두부기술, 일본에 끌려간 김해 여도공 백파선, 조선 병사 귀·코무덤 등 수많은 조선 역사를 찾아 바로 세웠다. 그런 김 박사가 이번에는 '박어둔'을 재조명했다. 안용복의 그늘에 가려 안용복 보다 더 독도를 지킨 박어둔의 행적과 공로를 발굴해 그 뜻을 선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편집자 주>



◆ 새로운 사실...독도를 지켜 우리섬으로 만든 박어둔(朴於屯)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한·일 사이에 독도문제가 터질 때 마다 독도는 한국영토라며 독도를 지켜준 안용복(安龍福)을 고맙게 떠올린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안용복과 함께 독도를 지킨 '박어둔'의 역할이 더 크다. 1970년도 박정희 대통령은 안용복이 독도를 지켜 한국 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씨 종친회에 안용복의 의인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부각됐다. 장군의 명칭도 하사해 독도 지킴이라 며 안용복(장군) 업적을 찬양한다.


또 안용복 업적을 기리기 위해 울릉도에 막대한 예산을 들어 안용복 기념관·박물관을 건립해 후세 교육관으로 삼고 그의 선양사업에 힘을 실었다.


물론 영토 수호 정신은 후세 대 귀감이 되는 것이지만 역사는 바로 알아야 한다. 안용복과 함께 독도를 지킨 박어둔을 우리는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다. 안용복의 그늘에 가려 안용복을 있게한 박어둔은 우리의 뇌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지금으로부터 330여년 전 독도를 일본인이 자기 영토로 만들기 위해 많은 수많은 일본 어선이 들어 와 고기잡이를 일삼을 때 부산 안용복과 울산 박어둔이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쫓아 냈다. 이러기를 수년 간 반복하자 숫자가 많은 일본 어부들이 안용복과 박어둔을 일본으로 납치해 가게 된다.


일본에 간 박어둔과 안용복은 일본왕에게 "독도는 조선 땅 인데 대마도 왜구들이 경상도 울릉도 독도바다까지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많은 것을 약탈해가니 조선 임금님이 울릉도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도록 공도(空島)정책을 쓸 때 일본 어선이 들어 와서 행패를 부리고 고기를 잡고 있다"고 항변했다.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이 울릉도에서 납치되어 일본에 갔다 온 3년 후 안용복과 뇌헌 (여수 흥국사)스님 등 11명이 울릉도와 독도를 경유, 도일(渡日)해서 두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돌아왔다는 문서가 이를 증명한다.


박어둔은 당시 울산에 염전을 경영하는 소금 상인이다. 당시 염전은 지금의 삼성 반도체에 버금가는 경제력가다. 염전을 운영하면 당연히 배도 있어야 한다. 독도를 지키는 데는 배와 경제력은 필수였다. 이 모든 뒷 받침을 박어둔이 책임졌다. 다만 안용복은 부산에 거주하며 일본사람과 접촉이 많아 일본어가 능통했다. 박어둔의 뒷 힘으로 아용복이 독도지킴이의 입이되어 원팀을 이뤘다.


일본『죽도고(竹島考)란 기록문에 안용복 보다 박어둔의 인적을 울산 청량 목도리 12로 적고, 박어둔을 양반, 안용복은 천민으로 기록돼있다. 바로 박어둔을 주요 인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일본사에서는 박어둔을 안용복 도다 독도 관련 주요 인물로 보고 있다.


일본 왕도 독도가 조선 땅이란 것을 인지하고, 1696년 독도는 조선 땅이니 일본 어선이 독도에 들어가지 못한다.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해당 금지령에는 “지금까지 죽도(독도)는 일본 땅이라 어선이 출항 하도록 하였으나 지금부터는 항해를 금한다”라고 기록돼있다. 매우 귀한 문서사료다. 이문서를 바로 내(김문길 박사)가 발견해 보도했다.



더군다나 1853년 일본 통치자는 금지령이 내려 져도 밀업을 하니 밀업하는 자들을 사형 까지 시킨문서도 필자가 일본비밀문서실에서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이와 함께 본 필자가 박어둔 사건후 일본 막부의 지도 학자는 독도(죽도)는 “조선이 소유한 섬”이란 지도를 제작해 보관하고있는 것을 발견해 만천하에 공개했다.


박어둔 안용복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독도는 그 때부터 일본땅이 되었을지 모른다. 본 필자는 하물며 대마도가 조선 부속 섬이라는 것을 증명해 냈는데 우리 영토 독도를 인데 박어둔의 업적이 결코 안용복보다 작지 않은 것을 세상에 밝히고자 한다.



이 때문에 필자를 선두로 지난 6월 박어둔의 생가터에 독도 수호 박어둔 생가표적 판을 세웠다. 울주 부군수, 울산 정토사 주지, 향토사학자 이양훈 선생도 참석했다.


이런 가운데 안용복만 독도를 지켰다고 알려진 사실과 국가 예산을 들어 안용복 사료관(박물관)도 건립해 선양하므로써 더 큰 박어둔의 업적이 묻히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따라서 필자는 주장한다. 이제라도「안용복 사료관」명칭을「박어둔·안용복 사료관」으로 변경해 두 애국자를 함께 기려야 할 것이다.


마침 올해 초 울산(남구)과 경북(울릉군)이 양도시간 교류확대 협약을 체결했다. 두 기관도 “조선시대부터 울산이 독도수호 활동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은 역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고 울산 출신 박어둔이 안용복과 함께 독도 수호에 앞장선 기록”을 인정했다.


늦었지만 2014년 본 필자와 함께 울산 '정토사'에서 발족한 '독도수호 박어둔 선양회'를 위시해 박씨 문중에서도 안씨 종친회와 교류해 양 가문이 조상의 업적을 공동으로 선양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김문길 약력]


영천 청통면 호당리 출생, 호는 峴井(현정)

계명대학 졸업

일본 경도 대학 연구

국립 고베 대학 한일관계사 전공

일본 고베대학 학술박사, 철학 박사 취득

계명대학·부산외국어 대학 교수(퇴직)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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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1 개)
  • guest2023-02-19 08:57:04

    솔직히 안용복이 지키고 박어둔이 같이 지킨거니깐 똑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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