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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박사, 조선인 1호 귀국선 우끼시마마루 폭침..."日, 조선인 두 번 죽였다." - 선체 인양하면서 또 한 번 폭파..."일본은 돈벌이 고철 인양에 유해 팽개쳐"
  • 기사등록 2024-08-15 23:22:33
  • 수정 2024-08-16 15: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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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조선인 1호 귀국선 우끼시마마루 폭침..."日, 조선인 두 번 죽였다."

美 출항금지령에 강제 출항, 日 의도된 폭침

선체 인양하면서도 또 한 번 폭파 후 인양

"일본은 돈벌이 고철 인양에 유해 팽개쳐"

정부·정치권 "진정성 있는 희생자 위로"필요


▲ 1945.8.24 폭침된 우키시마마루를 5년 후 1950년 인양하면서 다이너마이트로 또다시 폭파해 고철만 인양했다는 재일 조선인 항의 지라시 문서 (제공 :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김문길 박사)


美 연합군에 패망한 일본이 1945년 8월 22일 출항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조선인 1호 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를 마이즈루항에서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의도적으로 폭침시켜 조선인 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본지 지난해 8월 16일 자 보도)


그런데 이번에는 폭침된 배를 인양하면서 다이너마이트로 또다시 폭파해 고철만 인양했다는 재일 조선인 항의 문서가 발견됐다.


지난해 美 연합군 발신(수신:日 토요타 후쿠다케) 대해령 53호와 56호를 입수해 "우키시마마루를 일본이 의도적으로 폭침시켰다"는 日 문서를 공개한 김문길(한일문화연구소장) 박사가 이번에는 15일 광복절을 맞아 폭침 5년 후 인양 과정에서 또다시 폭파해 고철만 인양한 사실을 폭로했다.


김 박사가 15일 본지에 보내온 문서 등에 따르면 1950년 2월 전쟁 무기 생산을 위한 고철이 필요한 일본은 5년 전 폭침시킨 우키시마마루호를 인양하는 과정에서 배를 수중에서 다시 폭파한 후 필요한 고철만 인양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다이너마이트로 배를 폭파해 인양한다는 사실을 안 조선인들이 현지에서 시위를 벌이고 또 홍보 문건을 인쇄해 배포하는 등 일본에 항의한 재일 조선인 항의 지라시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재일 조선인 항의 문건(지라시) 참조)


문건에 의하면 당시 인양 업체는 일본 정부의 공개 입찰로 오사카 이노 중공업(飯野 重工業會社)이 선정돼 이런 폭파 후 인양을 선택했다.


김 박사는 현지 취재에서 "당시 조선인 유해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지만 일본은 비인간적으로 고철에만 몰두했다"는 것.


당시 조선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일본 정부 너희는 돈벌이 고철이 중요하나 억울하게 죽은 우리(조선인 피해자) 아버지 유해가 중요하나? (유해를) 안전하게 인양하라"라는 외침이, 이 문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 인양하면서 "고철에 걸려 온 유해는 화장하여 일본군 전몰자가 잠들어 있는 야스쿠니 우천사(佑天寺)에 보내저 보관 돼 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일본은 지금도 유해도 돌려주지 않고 우키시마마루는 미군들이 묻어둔 기뢰에 배가 침몰했다. 불가항력적 침몰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


'우키시마마루(호)는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이 광복되자 美 연합군에 의해 조선인을 귀국시키면서 당시 일본은 상선을 개조한 최대 4730t(톤)급 군함이다.


여기에 조선인 8000여 명(당시 부산일보 보도)을 승선시켜 1945.8.22 오후 10시 홋카이도 시모키다 오미나도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해상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타이타닉(승선 2500명)에 비해 무려 3배가량 많은 숫자다.


당시 美 연합군에 의해 8.22 18시 이후 항공 선박 운항 중지 명령과 이미 출항한 선박은 안전한 곳에 정박해 훈시를 따르라는 대해령 52호 명령이 있었지만, 일본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배에는 대량의 폭발물이 실려있었다. 항복 후 하역하지 않은 폭발물이다. 전쟁 물자 운송본부는 전보 3070호로 우키시마호 선장 도리카이가네오에게 폭발물 하역을 명령했다. 우키시마호 출항 2시간 30분 전인 1945.8.22 17시 30분이다. 하지만 그대로 출항했다.


▲ 우키시마마루 폭침이 일본의 의도적인 폭침으로 알고 내린 美 연합군 대해령 56호, ˝동남·남서·조선 방면 등 10개 방향 함대는 전면적으로 정전(停戰)을 실시하라˝는 이 문서는 우키시마마루 폭침 3일 후 발령됐다. 더 이상 희생은 안 된다는 문서다. (김문길 박사 제공)


오미나도 항을 출발한 우키시마마루는 1945. 8. 24 오후 5시 20분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항으로 진입하면서 폭침됐다.


우키시마호가 폭침된 후 8.27. 대해령 56호가 추가 발령됐다. 폭침 3일 후다. 우키시마호 폭침은 일본의 자폭임을 알고 내린 명령이다. 즉 "동남·남서·조선 방면 등 10개 방향 함대는 전면적으로 정전(停戰)을 실시하라"라는 명령이다. 더 이상 희생을 금지하기 위한 문서 명령이다.


사고 후 日 정부는 승선 인원은 3735명, 기뢰로 사망한 524명(일본 기관병 24명 포함)으로 발표한 바 있다.


김문길 박사는 해방 79년 광복절을 맞으면서 "(자신이 입수한) 자료에 의해 언론상을 받은 언론인이나 다큐 제작회사, 우끼시마마루 진상규명과 국회의원 등 많은 사람들이 고국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조선인 희생 영혼들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위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면서 "보여주기식 관심(실제 무관심)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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