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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영천 복성전투, 이순신 명랑해전과 맞먹는 역사평가 받아야 - 정규정_하기태, "영천 복성전투 기념사업회 만들자!"
  • 기사등록 2017-09-21 00:42:15
  • 수정 2017-09-21 00: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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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 영천 기자실에서 브리핑으로 ˝더 늦기 전에 영천 복성전투 재조명하여 후대에 올바른 기록을 남기자˝며 영천 복성전투 기념사업회를 만들것을 제안하는 정규정 한국B·B·S경북지부 명예회장


[장지수 기자] 영천 복성전투가 다시 재조명받고 있다. 6.25가 있기 전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구로부터 나라 운명의 불씨가 된 가장 혁혁한 전과가 있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투가 타 지방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반면 정작 성지인 영천에서는 잊혀져가고 있어 안타깝다는 반응이다.


이 때문에 최근 영천 복성전투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지역의 역사적 문화행사로 자리매김 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2015년 영천에서 저명교수 8인으로 구성된 복성전투 재조명을 위한 마라톤학술대회 후 2년여 만이다.


이는 지난 8월 초 하기태 영천시행정자치국장이 지역 각 언론사에 “영천 복성전투는 꺼져가는 구국의지의 도화선이 된 전투라”며 역사적가치 재조명을 위한 독자기고문을 쓰면서 가시화했다.<아래 사진> 이와 함께 한국B·B·S경북지부 정규정 명예회장도
지난 9월 들어서부터 지역 각 언론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성전투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가치 설명으로 재조명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20일 지역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갖고 “영천 복성전투야 말로 이순신의 명랑해전과 맞먹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강조하고 ‘영천 복성전투 기념사업회’ 추진을 위한 출발을 선포하고 각 언론의 역할을 당부하고 나섰다.


정 명예회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임란부터 근대사까지 조목조목 복성전투의 발자취를 설명하며 기념탑 및 기념관 건립, 국정교과서 수록, 문화행사로의 승화 등에 시민 모두가 동참해 줄 것도 호소했다.


또 정 명예회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영천 복성전투에 대한 사업을 시(市)에도 건의해 왔지만 반응이 없었다.”면서 “시민들
로 부터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 뒤 “늦었지만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기념사업회 발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날 정 명예회장은 또 “군산에는 최무선 장군이 화약·화포 80여척의 배로 500여 왜 적선을 물리친 '진포대첩기념비'로 웅장한 ‘수시탑’이 세워져 있지만 한 때 최무선 장군이 영주사람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자신이 영천 인으로 바꾸었다”면서 이제 우리도 우리지역 역사를 다시 찾고 재정립하여 올바른 기록을 후대에 길이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영천복성전투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당시 왜군에 관군이 패하자 순식간에 조선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피신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동안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가까스로 국운의 불씨를 되살린 전투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조선에 내어달라는 명분이었지만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아 백성들마져 뿔뿔이 흩어져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영천에서 왜장 가등청정의 2만 군사를 대적해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등이 의병을 일으켜 게릴라전 양상으로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같은 승전보와 함께 의병의 사기가 오르자 영천성 탈환을 본격적으로 세우게 된다. 이것이 영천 복성전투의 시초다. 영천성 탈환을 위한 최초 정예연합의병조직인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 이때 결성됐다.


당시 창의정용군은 군율을 두고 있었는데 1.겁을 먹고 불온하나 말을 하는 자, 2.적을 보고 5보 물러서는 자, 3.마음대로 독단하고 장수의 명을 어기는 자, 4.전투에 임해서 대오를 이탈하는 자는 참할 것이라는 엄한 군율을 두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당시 창의정용군의 의병대장에는 권응수 장군이다. 좌총에는 신해(하양), 우총은 최문병(자인), 중총 정대임(대전동), 찬획 종사에 정세아 등이고 의병의 수는 4,000에 이른다.


최후의 전투는 1592년 4월 23일 임란 발발 3개월 4일째인 7월27일이다. 화공전으로 총공격을 시도해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 끝에 얻은 임란 최초 육지전의 첫 승리였다.


이 영천 복성전투의 승리로 의병과 관군은 여세를 몰아 경주성 탈환으로 이어졌고 잇따라 영양, 경산, 대구, 의성, 울산 등 전투에서 연전연승의 승전보를 울렸다. 이 전투는 당시 명랑해전과 함께 임란 중 최고의 승리로 이순신이 세운 전공과 동일하게 당시 신록과 유성룡, 이항복, 최헌 등의 평가를 받았다.


또 이 승전으로 적의 후방 보급로차단, 낙동강 전선 사수, 전라도 곡창을 지키며 결국 왜군을 후퇴하게 만드는 단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천 복성전투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영천에서만 2,300여 의병의 승전에도 겨우 2~3명에만 포상이 주어졌고, 당시 전투보고자인 경상좌병사 박진이 마치 자신의 전과인 것처럼 보고하고 의병의 역할을 축소시켜 훗날 정확한 사실 파악이 어려워지고 역사의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국사에 수군과 이순신의활약은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영천성 복성은 언급조차 없고, 의병활동상에서도 곽재우나 김면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영천지역 의병장에 대하여는 미미하게 이름만 거론되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조차 영천성 복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것.


이와 관련해 임란사 학술대회에 참여했던 학자들은 영천성 복성과 영천지역 의병장들의 역할이 제대로 재조명되어 교과서 등에 반영되기를 기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의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서 국운의 불씨를 살린 영천 복성전투는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재평가되어 후대에 올바른 역사인식을 제고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4,000여 의병의 한과 호국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B·B·S경북지부 정규정 명예회장의 설명에 따른 것으로 일부 역사서에 의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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