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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관동대지진 101년, 조선인 학살…. 日 병사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의 조선인 학살 현장 목격담을 쓴 日계엄군(병사) 기…
  • 기사등록 2024-09-04 11:21:37
  • 수정 2024-09-04 11: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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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日, 병사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大正 12년 9월부터 12월까지 100쪽 분량

지진 직후 日 계엄군(병사)이 쓴 최초 사례

지진 다음날부터 매일 학살 현장 직접 담아

일군·경 치안 이유 조선인 무차별연행 학살

구체적 학살 방법 가해자 이름까지 기록돼

학살 입단속 日 계엄군 지시 기록 첫 발견


▲ 101년 전 1923.년 관동대지진 다음날부터 그해 12월까지 지진 참상을 현장에서 본대로 일기로 기록한 일본군 계엄사령부 나라시노 기병연대 소속 이등병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 이 일기는 일명 다이소일기(大正日記) 라고도 한다. (사진 제공/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2024년 9월 1일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지 꼭 10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해 9월 일본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100년을 맞아 조선인을 학살한 기록 「100년간 숨겨진 관동대지진 진실...아오야마 학생 617명의 지진기록 '진재기'(震災記)'」를 공개한 본지 애독자 김문길 교수(한일문화연구소장)가 [영천투데이 2023년 8.31. 9.6. 9.18. 연속 보도]


이번에는 101년 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본 병사의 일기를 공개했다. 일본 계엄사령부 나라시노 기병연대 소속 이등병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의 日記다. 일명 다이소일기(大正日記) 라고도 부른다.


▲ 본지 애독자 김문길 교수(한일문화연구소장) 김 교수는 ˝역사를 바로 알리자는 학문과 민단의 목소리를 반일로 매도해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며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정치적 반일감정에 이같은 역사 진실을 이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교토대학 외국인 교수, 부산 외대 퇴직(명예) 교수, 교토대헉 국립 고배대학 일본사전공(한일 관계사)철학 박사와 학술박사를 취득하고 35년간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 일기는 그동안 후손이 보관해 오다 1995년부터 30년 동안 일본 속에서 한·일 역사 자료를 추적해 오던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이 입수해 지난달 29일 본지에 그 사본 전문을 보내왔다.


후손은 지진 당시 『大正12年 日記=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를 김 교수에게 내놓으면서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조선인 학살 사실을 구보노 스게지가 지진 당시 계엄군으로 근무하면서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일기에 담은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


일기는 지진 다음 날인 大正12年(1923년) 9.2부터 그해 12월까지 매일 기록한 100쪽 분량으로 가해자 이름, 잔인한 살해 방법, 살해 인원수, 살해 사실에 대한 입단속 지시 등이 자세히 수록됐다.


▲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계엄령 선포(왼족 줄친부분)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오른쪽 네모)는 기록이다. (김문길 교수 제공)


당시 일본은 지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치안을 위한 계엄을 선포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지른다. 조선인 3000명이 화약고를 습격한다."는 등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 경찰과 자경단원 등이 무차별 연행해 학살했다.


김문길 박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학살에는 평소 日 정부는 3.1운동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고, 지진을 계기로 유언비어를 확산시켜 조선인을 마구잡이로 잡아다 죽였는데 이는 3.1운동에 대한 보복 성격이 짙다"는 설명이다.


일기에 따르면 지진 다음날인 9월 2일 계엄이 선포되면서 무차별적인 유언비어 살포와 함께 마구잡이식 조선인 학살이 자행됐고 신요시하라 공원에서 500명, 도쿄 일대 3500명, 후나바시에서 1200명의 조선인이 희생됐다.


▲ 지진 발생 이틀째인 9월 3일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조선인 23명을 끌고와 총살을 시켜도 한 사람도 저항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죽인 조선인들 수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제공/김문길 교수)


지진 발생 20일 후(9월 20일) 고마쓰 천에서 조선인 여성 200여 명을 살해한 가해자는 일 병사 '이와나미' 소위와 '모치츠기' 상병 두 명을 특정해 기록에 남겼다. 총에맞아 죽으면서도 단 한 명도 저항 한 번 없이 죽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살해 방법과 죽음에 이르는 배경도 가지각색 잔인했다. 총살은 물론 여인의 가랑이를 찢고, 죽인 시체의 목에 쇠뭉치를 달아 연못에 던졌다. 어떤 여인은 동경 신요시하라(新吉原)공원 저수지에 스스로 뛰어들어 익사한 것으로 묘사했다.


▲ 지진 발생 20일째인 9월 20일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선량한 조선 여성 200여 명을 이와나미(岩波)소위가 잡아와 총살시키고 어떤 여인은 가랑이를 찢고 어떤 여성은 시체 목에 쇠뭉치를 달아 연못에 던저졌다고 기록 되어 있다. (제공/김문길 교수)


학살은 조선인만은 아니다. 중국인도 포함됐다. 10월 21일자 일기에는 이런 외국인 학살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조선인, 중국인 살해를 절대 비밀로 하라"는 입단속 문구가 뚜렷이 적혀있다.


김문길 교수는 조선인을 살해하고 입단속 등 엄격한 통제로 실제 관동대 지진으로 조선인 중국인 피해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면서 "억울하게 죽은 수천 명의 조선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지진 발생 89일째인 11월 28일과 29일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조선인, 중국인 살해를 절대 비밀로 할 것. 계엄군과 경찰에 입단속 지시 문구가 기록돼 있다. (제공/김문길 교수)


관동대지진으로 약 10만명 이상 인명피해가 났다. 1952.12.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조사하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에는 251명(3.1운동 피살자 38명 제외)의 사망자 명단만 보관돼 있다. 당시 독립신문은 6661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


관동 대지진은 현재 민간 차원의 실태 파악이 고작이다. 일본 정부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라는 핑계로 진상 파악과 사죄는 물론 지금까지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


한편, 김문길 교수는 지난해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아 당시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지진 상황에 대하여 보고 느낀 대로 도쿄 아오야마 학생 617명이 지진 발생 한 달 후 쓴 친필 일기 '진재기(震災記)'를 단독 입수해 공개한 바 있다.


또 김 교수는 일본 속에서 찾은 한·일 역사 자료와 日 정부가 공개를 꺼리는 비밀문서 관련 <일제 강제노역, 일본의 독도 강제편입 실마리, 임란 후 일본군 집단 강영(탈영), 독도 비밀문서 국회 전시, 해방 후 조선인 귀국선 1호 우키시마호 폭침,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日 정부 중의원 영토담당 논쟁> 등을 발굴해 본지에 제공해 왔다.


▲ 지진 발생 51일째인 10월 21일 구보노스게지(久保野茂次) 日記. 신문에는 동경 일대에서만 조선인 3500명을 죽였다. 동경에 신요시하라(新吉原)공원 내 저수지가 있는데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사람, 육상에서 죽은사람 등 500여 명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제공/김문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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